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아내의 풍금

권영상 2015. 3. 1. 12:24

아내의 풍금

권영상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지금도 그 시절 풍금소리가 귀에 아련하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왜 그랬는지 비가 오는 그날 학교길이 늦었다. 아무도 없는 10리 들길을 혼자 걸어 학교로 갔다. 학교 후문에 막 들어설 때다. 우리 교실에서 풍금소리가 들려왔다. 배우지 않고도 누나를 통해 알고 있는 ‘섬집 아기’였다.

 

 

 

교실엔 벌써 1교시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풍금소리를 들으며 우리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들 노랫소리가 창문을 타고 가득히 넘어왔다. 도저히 그 분위기를 깨뜨릴 수 없어 복도 출입구에 걸터앉은 채 1교시가 끝나도록 그 노래를 들었다. 풍금을 켜며 선생님이 한 소절을 먼저 부르시면 아이들이 따라 부르고, 그러다가 또 어떤 곳에선 풍금소리가 뚝 멎고, “딱딱딱!” 선생님께서 교탁을 자로 치는 소리가 들리고, 교실이 잠잠해지고, 또다시 풍금에 맞추어 노래가 시작되고.......

노래를 듣는 동안 나는 외로웠다. 비 탓이었을까. 어쩌면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혼자 바깥에 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겠다. 그러나 실은 내 마음을 부르르 울리던 풍금 탓이었을지 모른다. 그 옛날의 풍금소리가 지금 내 귀에 고요히 들린다.

 

 

 

풍금을 받으러 방금 안성에 내려왔다. 초등학교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쳐온 아내가 지난 2월에 퇴직을 했다. 퇴직을 하고도 학교에 두고 온 아내의 낡은 재물이 있다. 풍금이다. 아내가 풍금을 사서 음악 수업을 해온 지는 오래 됐다. 그러니까 학교가 인터넷의 디지털 음원으로 수업하기를 요구하면서부터다. 아쿠스틱한 악기를 사랑해온 아내에게 있어 디지털음원은 아무리 편리하다 하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들이 점점 거칠어지는 이유가 교실에서 풍금이 사라지기 때문일지 몰라.”

아내는 늘 그 말을 했었다.

 

 

 

나도 언젠가 초등학교 교실에 가 보고 놀랐었다. 어느 교실이나 창가에 늘 있어온, 풍금이 있던 자리가 모두 비어 있었다. 대신 교실 앞 천정에 디스플레이 패널이 하나씩 달려있었다. 풍금은 그때부터 교실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선생님이 풍금을 켜시면 그 소리에 맞추어 따라 부르던 그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의 우리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어떤 감정의 동질성을 느꼈다. 교실 처마를 향해 기어오르는 나팔꽃을 보며, 해바라기를 보며 입을 맞추어 노래를 부를 때면 마음이 한결 맑아졌다. 동무와 다툰 일이며, 숙제를 못해 야단맞은 일, 돈이 없어 학용품을 준비하지 못한 서러움이 풍금소리와 함께 말끔히 씻겨나갔다.

 

 

 

내게는 그런 풍금에 대한 향수가 있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어떻든 아내가 전근을 갈 때면 아내의 풍금도 아내의 기타도 용달차에 실려 아내를 따라 낯선 학교로 갔다. 거기서도 아내는 디지털 음원 대신 풍금과 기타로 음악수업을 했다. 눈 내리던 지지난 해 2월, 여의도 모 초등학교로 아내가 전근을 갔을 때다. 그때에도 나는 운동장이 내다보이는 아내의 교실 창가에 풍금을 놓아주고 돌아왔었다.

오늘 아내는 그 풍금을 안성으로 내려 보내기 위해 퇴직한 학교로 갔다. 운반비가 좀 들더라도 안성에 내려놓기로 했다. 오랫동안 아내의 손때가 묻은 풍금을 섣불리 처분하고 싶지 않았다. 풍금엔 아내의 아이들을 아끼며 살아온 인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안성에 내려오는 대로 방 청소를 했다. 그리고 풍금이 놓일 자리를 정리해 놓았다. 안성은 내가 혼자 내려와 사나흘, 또는 닷새씩 머물다 가는 곳이다. 일을 하다가 힘에 지치거나, 때로 심심할 때, 또는 잠이 오지 않아 적적한 밤 거실에 나와 풍금을 켜며 풍금을 내 동무로 삼을 생각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1시간 30분이 걸린댔다. 서울서 2시에 출발했으니 벌써 그 시간이 다 됐다. 풍금을 기다리는 마음이 자꾸 설렌다. 마늘밭에 나갔다. 멀칭을 해놓은 비닐 안에 마늘 순이 파랗게 올라온다. 지난 12월초 눈이 마구 내리던 날 아침, 아내와 함께 마늘을 심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마늘이 얼까봐 비닐을 덧씌워놓았었다. 비닐 위에 얹어놓아둔 토마토 지지대들을 하나하나 들어내고 있을 때다.

 

 

 

휴대폰이 울었다. 풍금을 싣고 온 차가 벌써 마당에 와 나를 찾고 있었다. 풍금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히 왔다. 용달차 기사는 풍금을 내려 거실에 놓아주고 이내 떠나갔다.

물티슈로 풍금을 말끔히 닦았다. 장난꾸러기 아이들과 오랫동안 교실에서 살아오느라 모서리가 닳고, 껍질이 벗겨지고, 뚜껑에 난 흠집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풍금 잘 닦아놓고 나니 집이 달라 보인다. 여기 안성에 내려와서도 풍금은 제몫의 품위를 가진다.

 

 

 

의자를 당겨 풍금 앞에 앉았다. 풍금 너머에 음악책을 세워들고 앉아 노래 부르기를 기다리는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보인다. 나는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풍금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건반 위에 양손을 얹었다.

아, 그래!

금속 리드를 울리며 내 손에서 울려나는 풍금 소리.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바람의 색깔이다. 바람의 향기가 깊고 부드러운 평균율의 빛깔이다. 몸 깊숙히 숨어있는 감정을 풍부히 일으켜 세우는 아쿠스틱 악기의 은은한 멋이 살아난다. 아내는 이 풍금으로 아내의 교실을 거쳐 간 수많은 녀석들을, 공부에 시달리느라 거칠어져가는 아이들 마음을 어루만지고 달래어 주었겠다.

페달을 놓고, 풍금을 어루만져 본다. 아내의 체온이, 아내의 인생이 조용히 느껴지는 듯하다.

 

 

 

“풍금에서 당신 목소리가 나네.”

아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고마워.”

금방 답이 왔다.

오늘 밤 나는 이 풍금 앞을 떠나지 못하겠다.

서투르나마 ‘섬집 아기’를 켜며 조용한 밤을 풍금과 함께 보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