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무들처럼 꿈에 부풀어 보고 싶다
권영상
남쪽 장흥 바닷가에 봄이 왔다는 소식이 들린다. 거기 동백꽃이 한창이란다. 동백꽃 소리만 아련히 풍문으로 들어도 먼 이쪽의 어느 산에는 몰래 봄이 움트려고 애쓴다. 해마다 이쯤이 되면 봄이 기다려진다. 자꾸 창 너머를 바라보게 되고, 덧없이 구름만 오가는 하늘을 자꾸 쳐다보게 된다. 봄이라는 말만 들었는데도 큰 파도에 부딪힌 조각배처럼 몸이 일렁일렁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흔들린다.
아침에 집 앞 산에 올랐다. 산 공기가 싸늘하다. 그래도 산빛만은 다르다. 어제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산 같아도 매일 산에 올라보는 사람이라면 그쯤 달라진 건 안다. 그냥 보면 안다. 빛이 한 가지 색으로 고정된 게 아니라 흐릿하다. 이쪽 빛깔에서 저쪽 빛깔로 넘어가는 흐릿한 경계에 서 있는 그런 빛깔을 보게 된다. 바늘귀에 실 끝을 겨눌 때 바늘구멍인지 아닌지 경계가 허물어져 가물가물 흐릿한 그런 상태가 요즘의 산 빛이다.
웬걸, 산언덕 양지바른 곳에 봄기척이 있다. 생강나무가 수상쩍다. 어제까지 젖꼭지처럼 통통하던 꽃망울이 노랗게 움튼다. 생강나무를 건너다보고 서 있는 참꽃나무에도 분홍봄빛이 아른아른하다. 성급한 가지 끝엔 참꽃이 반쯤 머리를 내밀었다. 그래도 꽃 피려면 2주일, 길게 잡는다 해도 2주일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지금 나는 몹시 봄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꽃 피는 봄이 오면 나는 뭘 할까. 꽃들이 부산하게 꽃을 피우는 동안 나는 뭘하고 있을까. 나무 앞에 서서 다가올 봄을 생각한다. 살구꽃 피고, 벚꽃 향기에 젖는 봄이 오면 나는 뭘 할까. 대체 뭘 하려고 나는 해마다 이맘때면 봄을 기다리는 걸까.
“탕탕탕탕......”
그럴 때다. 딱따구리가 고요한 산을 두드린다. 산이 꽉 닫힌 문을 여느라 저르르 떤다. 막혔던 내 귀가 열리고, 얼었던 심장이 다다다다 다시 뛴다. 어디서 추운 겨울을 넘긴 새들이 일시에 운다. 찌르레기가 운다. 보슬보슬 봄비처럼 속삭인다. 지난여름 나를 따라 다니며 호르호르 울던 휘파람새 목소리다. 그들이 척후병처럼 벌써 왔다.
엊그제 보름에 양재천에 나가봤다. 갯버들가지마다 버들강아지 보송보송 폈더라. 갯버들 뿌리를 적시며 흘러 흘러 흘러가는 개울물을 한참이나 내려다 봤다. 속이 들여다보이도록 맑더라. 그 물도 지난여름엔 흙탕물이었다. 그러던 물이 욕심을 버리듯 탁류를 가라앉혀 물을 맑혀놓았더라. 이제 봄이 올 때쯤이면 개울바닥이 드러나겠다. 개울이 드러나면 저기에 기대어 살던 물고기들이 몸을 숨길 데가 없겠더라.
그러고 보면 양재천은 나보다 더 봄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비울 대로 강바닥을 비우고 있다. 봄비 내린다면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다 받아들일 자세다. 강변의 나무들도 잎을 피울 준비가 다 돼 있고, 개울물도 출렁출렁 노래 부를 준비가 돼 있더라.
대지도 그렇다. 산길을 내려올 때에 보면 올라갈 때와 달리 땅이 눅눅하다. 오후엔 발밑이 질어 자꾸 낙엽더미 쪽으로 발이 갔다. 낙엽을 긁어 길 위에 뿌렸다. 구청에선 나보다 먼저 거친 나무밥을 진땅에 뿌려놓았다. 대지도 슬슬 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땅에 묻힌 씨앗이 운신하기 좋도록 땅을 녹이고 있다. 봄은 시시각각 북반구를 향해 올라오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남부순환로의 건널목을 건너 혼자 느티나무 가로숫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세상은 봄을 맞으려 조심조심 제 몸을 깨우는데 아직 나는 아무 준비가 없다. 해마다 봄을 기다리고, 봄이 오면 뭐라도 달라질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아직 겨울 그대로다. 직장이 있을 때는 직장의 봄여름가을겨울에 맞추어 살면 됐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나의 일 년 계획이 아직 없다. 몇 번의 여행을 계획한 게 전부다. 그리고 늘 그저 그렇게 해오던 글을 쓰는 일과 안성에 텃밭을 가꾸는 일 그것 이외는 없다. 그러고 보면 나는 직장이 있을 때는 직장에 기대어 살아왔고, 직장에서 벗어났을 때는 나를 이끌어나가는 동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산다.
나도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처럼 푸른 꿈에 부풀어보고 싶다. 나도 봄을 기다리는 새들처럼 푸른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 내게도 노래하라면 노래 부를 나만의 노래가 있다. 봄이 오는 하늘을 향해 노래부르고 싶다. 봄이 오기 전에 내 마음의 봄을 그려야겠다. 거창할 것 없이, 소박하면서도 그때마다 달콤달콤한 봄을 노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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