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찜질방, 외박을 자극하다

권영상 2014. 2. 11. 14:00

 

찜질방, 외박을 자극하다

권영상

 

 

 

 

 

동네 전철역과 연결된 지하에 찜질방이 있습니다. 생긴 지 이태는 됐을 겁니다.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어느 때부터인가요.

가끔 홍대역 클럽에서 놀던 딸아이는 늦으면 친구들과 찜질방에서 자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찜질방 어떻게 생겼지?”

딸아이가 들어오면 나는 그게 궁금했습니다. 찜질방에 들어가는 법이며, 남녀가 섞인 방에서 잠을 자는 법, 등에 대해 물었지요.

그럴 때면 아내는, 외박하고 온 아이 야단은 안 치고 뭐하는 거냐며 내 옆구리를 쥐어지르곤 했지요.

 

 

“나도 한 번 가 볼 거야.”

나도 그곳이 그리웠습니다. 그렇다고 혼자 가기는 좀 두려웠습니다.

낯선 문화에 대한 낯가림이 심하거든요. 저금하는 법을 몰라 서른이 넘도록 비키니 옷장 위에 월급봉투를 올려놓고 꺼내 쓰던 게 나였습니다. 다들 미장원에 가 커트를 할 때에도 미장원의 동선을 몰라 바보 소리 들을까봐 이발소만 찾아다녔던 게 나였습니다. 팬티를 살 때에도 그랬지요. 여자 점원이 있는 가게엔 차마 못 들어가고 아저씨가 일 보는 집만 찾아다니던 낯가림.

그 때문에 누군가 찜질방에 같이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하며 살았지요.

 

 

 

그런데 내게 하늘이 주신 때가 왔습니다.

강릉을 지키는 고향 친구가 찜질방에 와 하룻밤 자고 가라는 전화를 주었습니다. 하늘이 이렇게 때를 척 만들어 주시기도 하네요. 고향집 근처 강문에 있는 찜질방입니다. 찜질방에 들어가기 좋은 때를 맞추느라 인근 바닷가 횟집에서 회를 시켜놓고, 술부터 마셨습니다. 찜질방에 들어가 뭔가 촌스럽게 실수를 할까봐 그랬지요. 고향집을 가까이에 두고, 나는 어느 만치 술에 취한 몸으로 기대했던 찜질방에 들어갔습니다.

 

 

 

번호표를 받고난 그 이후의 과정이 좀은 복잡했지만 나는 술에 반쯤 취한 상태라 내 서툰 행동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날 나는 그 큰 넓은 방에서 마음껏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엔 늦게 일어났습니다. 남들은 아침 바다를 보러 간다며 깨어났지만 나는 그냥 그 넓은 공간에서 빈둥댔습니다. 아침 바다 풍경보다 널찍한 찜질방이 더 좋았습니다. 나는 2층 음식점에 올라가 순두부와 밥을 사먹고, 그러고도 떠나기 싫어 11시가 되도록 눌러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정말 좋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고 서울로 올라와 한 일주일을 살았는데, 마음에는 자꾸 그 찜질방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고향 도서관에 책을 기증할 일이 있어 서가의 책을 고르고, 네 개의 라면상자에 넣고, 묶고, 주소를 인쇄해 붙이고, 차에 싣고 나가 택배로 부치고 하느라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이 참에 당신 좋아하는 찜질방에 가 쉬었다 와요.”

아내가 마침 그때에, 시의 적절하게 그 말을 했지요.

나는 알맞추어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11시쯤 돌아올 거야.”

그러고는 전철역 근방에 있는, 평소에 한번 가고 싶었던 그 찜질방으로 갔습니다.

좀 서툴렀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신발을 넣고, 옷장에 옷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탕 속에 들어갔다가, 또 찜질방까지 무사히 갔습니다.

여자와 남자들이 뒤섞여 누운 방이었습니다. 거기엔 나이 먹은 자들도 있고, 내 딸아이 같이 나 어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쪽 벽에 매달린 커다란 텔레비전에선 ‘기황후’가 나오고, 한쪽 음식점 앞 간이의자엔 아주머니들 너댓이 둘러앉아 해외여행 이야기를 즐겁게 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쪽에선 남미에서 온 60대 남자들이 그 나라 주재 대사와 술을 마시던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습니다.

 

 

 

나는 그 소란한 틈바구니에 누웠습니다.

나는 그들처럼 빈둥거리거나 다리 운동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만히 나를 보려니 누워있는 내가 내가 아니었습니다. 소란한 것이라곤 딱 싫어하는 내가 아니었어요. 모르는 사람들과 아무 격의 없이 공동의 바닥에서 뒹구는 걸 싫어하던 그 내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주 낯선 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데나 벌렁 눕고, 소란한 이야기에도 둔감해진 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잔칫집에 모여든 내 사촌이나 당숙들 같이 정겨워 보였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누워 있다는 게 든든했습니다.

 

 

 

그러는 나는 정말 누구일까요?

11시에 돌아 가리라던 나는 그 일을 잊고 있었습니다. 대장내시경 후에 받아온 약 먹는 일도 잊었고, 내 손이 가야하는 어수선한 내 방도 잊었고, 성가신 양치질도 잊었고, 잠자기 전에 대문을 한번 보고 불 끄는 일도 잊고 그냥 내가 누워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한 아버지이고 남편인 것을 다 잊은 채 나그네처럼 빈둥거리며 누워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소란함은 나의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잊게 하는 마취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찜질방을 그리워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룻밤 자고 싶다는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하룻밤, 집이 아닌 데서 외박을 한다는 해방감. 그것이 나를 유혹했던 것입니다.

 

 

 

 

이 산 저 산 산골짜기를 헤매며 사냥을 하다가 불빛이 보이는 낯선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돌아오던 수렵 시절, 내게는 그 시절 그 사내의 유산이 남아있었던 겁니다.

나는 11시를 기다리다 깜물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도중에 깨어보니 새벽 1시 40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광장에 떨어진 낙엽들처럼 널브러져 자고들 있었습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여기 누워 그렇게 자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들이 다 나와 같고, 내가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니 어떤 연대감이 들었습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한번 눈을 뜨면 도통 잠이 안 오는 게 나의 습관인데, 나는 아무 고충 없이 또 잠이 들었습니다.

 

 

 

출근을 하는 사람들인지 머리맡을 지나는 발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아침 7시였습니다. 나도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이구, 아버지란 사람이 애 보는데서 잘 한다.”

출근 준비를 하던 아내가 날 보고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나는 또 그 옛날의 수렵인처럼 온갖 변명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외박을 하였네요.

우리나라란 참 놀랍도록 좋은 나라입니다.

밖에서 혼자 자 보고 싶은 도시민의 심정을 이토록 잘 헤집어 내어 외박의 기회를 만들어 줍니다. 이런 나라를 두고 이민 간다면 억울하기 짝이 없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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