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강릉의 2월 눈
권영상
“하여튼 눈이 어엽게 왔사! 며칠째 눈만 봐 그런지 머리가 띵한기 어지르와.”
강릉에 한창 눈 오던 날, 고향 조카한테 전화를 했더니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흘 동안 2미터 가까이 내린 눈만 보아왔을 테니 현기증세가 있으려면 있겠다. 흰색 병실에 갇힌 환자가 어지럼증을 호소하듯 열흘 동안 백색 눈만 보았으니 눈 멀미가 나려면 날 테다. 눈은 잔인하다. 일종의 백색테러다.
강릉엔 조카들이 고향집을 지키고 있다. 작은형수님도 계신다. 또 속초엔 누님도 계신다. 눈 소식이 요란할 적에 누님한테 전화를 드렸더니 집이 무너질까 걱정스럽다고 하셨다. 쳐도 쳐도 자리가 나지 않아 눈보다 사람이 먼저 지치겠다며 눈멀미를 내셨다. 1911년, 기상대가 관측한 이래 영동지방에 내린 최대의 폭설이라 한다.
그러나 강릉 태생이라면 이런 눈 폭설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흔히 겪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강릉 지방의 폭설은 거의 전설적이다. “자고 일어나 문을 여니 밤새 내린 눈이 처마 끝에 닿아있었다”라거나 “이웃집과 눈굴을 파고 다니며 아침 인사를 주고받았다”는 말은 강릉사람들 입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던 이야기이다. 그뿐이 아니다. “눈이 열흘낮 열흘밤을 내려 자식처럼 키우던 소를 잡아먹었다”는 말도 어른들한테 듣던 이야기이다. 그만큼 강릉의 2월 눈은 푸지고도 혹독하다.
눈 내린다 하면 강릉에만 내리는 법이 없다. 강릉을 굽어보는 대관령에도 함께 내린다. 강릉사람들이 말하는 대관령이란 대관령이면서 동시에 남으로 휘달려 내려가는 태백산맥이다. 대관령에 회색 눈이 퍼부으면 멀지 않아 그 눈이 강릉으로 내리달렸다.
당나귀의 응앙응앙 울음소리처럼 눈이 푸짐하게 내리는 밤이면 어린 우리들도 잠을 못 잤다. 허리를 꺾으며 쩡쩡 쓰러지는 소나무들의 울음소리 때문이다. 사람 사는 터전을 지켜주는 소나무들은 사람대신 눈 무게에 못 이겨 먼저 꺾여난다. 이런 날의 깜깜한 밤은 그 울음소리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도 잠에서 깨어 어흠, 하고 미닫이문을 열어 바깥을 내다보실 때에 바깥은 마치 아득한 저승이거나 형형한 눈귀신의 세상처럼 낯설기만 했다.
그런 날 아침이면 바빠진다. 아버지 뒤를 따라 눈가래로 눈을 쳐야 한다. 변소로 가는 길을 내고, 우물 길으러 가는 우물길을 내고, 장독대로 가는 뒤란 길을 내야한다. 그리고 넓은 농가의 마당에 쌓인 눈을 쳐야한다.
그러고 나면 마을과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친다. 장한 눈에 길이 사라졌으니 대충 짐작만으로 길을 내어간다. 그러다가 허리를 펴는 중에 문득 눈에 들어오는 설해목들. 그 좋은 6.70년생 소나무들의 허리 꺾인 상처가 잔혹하다. 저렇게 몸통이 아프게 터져나느라 간밤에 설해목들은 숲이 떠나가라 울음 울었다. 강릉의 눈과 바람을 수십 년씩 잘 이겨낸 나무들도 하룻밤 내리는 장눈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럴 때에 그들 짙푸른 소나무숲 위로 번쩍 뜨는 하늘빛에 우리는 또 한번 놀란다. 그 하늘빛이 동해의 가을바다 물빛처럼 파랗다. 이런 섬뜩할 만치 푸른 하늘을 보여주려고 밤에는 그렇게 많은 폭설이 내렸다.
“어때? 눈 좀 마이 녹언?”
눈이 그쳤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전화를 했다.
“큰길 아니고는 눈이 상구 그대로지 뭐. 아주 딱 보기도 싫어요.”
조카의 체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방송에선 이제 강릉 눈이 그쳤다 하지만 강릉 사람들은 다 안다. 눈이 오려면 아직도 3월초까지 더 와야 한다. 와도 크게 더 올 눈이 있다. 교원 발령이 날 쯤을 전후해 한 번 더 와야 하고, 아이들 입학식에 한 번 더 와야 한다.
강릉에 눈 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리 두렵지 않다. 봄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강릉은 그렇게 2월 눈과 진종일 실랑이질을 치다가 어느 날 문득, 울담에 붉은 살구꽃을 눈부시게 피워놓는다. 그때가 벌써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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