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권영상 2014. 2. 2. 16:11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권영상

 

 

 

 

 

 내게는 50대 후반에 퇴직한 친구가 있다. 그는 나처럼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40여 년간 직장에 매달려 살았다. 사는 일이 바빴으니 동창회 모임이 있대도 나오지 못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흔한 등산 한번 해보지 못하고, 여행다운 여행 한번 못 해봤다고 했다. 괴로운 건 퇴직은 했으나 아직 취직을 못한 아들이 있다고 했다.

“집에서도 내가 있을 곳이 없어.”

커피숍에서 오랜만에 만난 그가 그랬다.

 

 

 

집에 있으려면 빈둥대는 자식 보기가 괴롭고, 자꾸 눈총만 주는 아내도 싫어 일없이 나돈다는 거다. 여기저기 일자리도 찾아보지만 하루이틀 일자리 밖에 없고, 그나마 일없는 날은 어디 가 있을 곳조차 없어 길을 걷는 게 취미가 됐단다. 40여년 일을 하고 퇴직을 했으면 좀 편히 쉴 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가 언성을 높였다.

자식들 출가시킨 친구들이나 연금을 받는 친구들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집에 있으면 ‘마누라 눈치 보여’ 매일 이 산 저 산 전전한다는 게 퇴직 후의 우리나라 남자들이다. 오랫동안 일 했으면 거기에 합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문화가 무엇보다 아쉽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번 설에도 여러 명의 친지들을 만났다. 그 중에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다니던 이가 새로 찍은 명함을 내놓았다. 직장을 옮겼단다. 회사에 들어간 지 불과 7년 만에 나왔단다. 신기술을 가지고 올라오는 젊은 친구들한테 치였다는 게 그의 말이다. 기업은 기술 순환이 빨라 경력직이 대접받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란다.

중학교 제자 중에는 공업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 취업한 이들이 있다. 그들 중에 한 제자에게서 언젠가 전화를 받았다.

“경력사원으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가 통화 중에 그런 말을 했다.

 

 

 

그는 여러 개의 기술 자격증도 갖추었고, 입사한 후 3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해 나름대로 보수도 괜찮게 받았단다. 그래서 회사에 대한 긍지도 갖게 되었고, 공부도 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대졸자가 신입으로 들어왔는데 그의 보수가 자신과 같다는 사실에 절망했단다. 갑자기 일할 맛이 안 났고, 자신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인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어 지금 직장을 그만 둘까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다. 작은 회사든 큰 회사든 사람을 대접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다.

 

 

 

 

교직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정년이 보장 되어 있다는 것이 어쩌면 교사들의 장점이며 약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교직이 철밥통이라며 언론은 걸핏하면 교사들을 향해 뭇매를 퍼붓고 있다. 교사를 봉투 받는 교사니, 성추행 교사니, 점수조작 교사니, 폭행교사니 등 일부의 문제를 들어 전체를 매도하며 그나마 선생님을 존경하던 풍토마저 일시에 망가뜨려 놓았다.

인사청문회 또한 그렇다. 그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을 불러다 놓고 온갖 먼지를 털어대며 형편없는 인물로 짓밟는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괜찮은 인물'이 '부도덕한 인물'로 추락하는 것에 쾌감을 느낀다. 청문회는 마치 '괜찮은 사람'을 털어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전락시키는 사냥터와 같다. 그러면서 서서히 사람을 존중하던 사회를 사람을 비하하는 사회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사회의 지나친 경쟁주의가 만들어놓은 부작용이다. 사회가 선의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자의 약점을 잡아 깎아내리는 비정상적인 사회로 변질했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존중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고 말았다.

이런 때에 괴물처럼 나타난 상업주의가 있다.

의료병원과 백화점이다. 이들은 이런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병폐를 일찌기 간파했다.

내가 5,6년 전 처음 임플란트를 하러 치과병원에 갔을 때다. 그때 나는 간호사들이 하는 말에 여러 차례 놀랐다. ‘가방, 여기 계시겠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어금니가 아프십니다.’, ‘휴대폰이 울리십니다.’......

간호사들은 사람은 물론, 써서는 안 되는 사물에게까지 존칭어를 남발했다. 나중에야 그런 말투가 특정 병원에서만 쓰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백화점도 지나치게 예의를 표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내를 따라 가끔 백화점에 갈 때면 그때마다 제일 처음 맞부닥뜨리는 곳이 있다. 백화점의 지하주차장이다. 차량 안내원들은 우리에게 필요 이상의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인사를 한다. 매장에 들어설 때도 그렇다. 양쪽에 도열해 고객을 맞는 그들의 인사는 오히려 민망할 정도다.

병원은 왜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의 가방이며 휴대폰에까지 존대어를 쓰고, 백화점은 왜 그들을 찾는 고객에게 필요 이상의  90도 각도 인사를 하는 걸까?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우리 사는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며 산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접받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의 심리를 재빨리 상업주의로 연결시켰다.

 

 

 

나만의 엉뚱한 생각일까?

비싼 의료비가 드는 병원엔 웬 환자들이 그렇게 많고, 경기가 나쁘다는 데도 명품 백화점엔 웬 사람들이 그토록 북적일까. 자본주의의 여러 요인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들 모두 사람대접을 받고 싶어 병원에 가고 백화점에 가는지도 모른다. 백화점의 우수고객이 되어보라. 당신은 백화점 주차장에서부터 품격있는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지갑을 털어가며 우수고객이 되려는 이들에게서 대접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슬픈 아픔을 느낀다.

“어금니가 아프십니다.”

가끔 치과에 가 그런 말을 들으면 이젠 그런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나뿐 아니라 내 어금니도 내가 내는 의료보험비로 존대 받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누가 이런 사회를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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