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즐거움
권영상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북쪽 울담은 개나리 울타리다. 아파트 지은지 오래 되었으니 그 개나리들 나이도 꽤 들었을성 싶다. 그들 덕분에 봄이 되면 별 모양의 개나리꽃 때문에 울타리 담장이 별나게 환하다.
내일 모레가 설이다. 은행이 붐비기 전에 오전 일찍 은행 볼일을 보고 개나리 울담길을 따라올 때다. 개나리 마른 숲에 노란 빛 한 점이 눈에 띄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빛을 향해 다가갔다. 개나리꽃이었다. 그러니까 개나리가 꽃을 피운 거다. 다른 가지들은 한겨울 잠에 빠져있는데 유독 그 한 가지만 꽃 피어있다. 꽃은 한 송이만 피었고, 그 가지의 다른 눈은 곧 피려는지 주둥이가 노랳다.
가끔씩 한겨울 도심의 길을 걷다보면 난데없이 핀 개나리꽃을 볼 때가 더러 있다. 나이 먹은 살구나무 한 가지가 한겨울에 꽃필 때가 있고, 노지의 매화도 깊숙한 겨울에 피는 걸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걸 온난화 탓이느니 푸근한 날을 잘못 짚어 그렇다느니 한다. 어떻든지 날씨에 민감한 나무들인 건 분명하지만 나무의 의중을 우리가 제대로 알 리 없다.
“네가 계절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구나.”
노란 개나리꽃과 마주 선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개나리 듣기 좋으라고 하는 내 붙임성 있는 말은 아니다. 개나리는 무려 수십 년이 되도록 이 울타리에서 살았다. 그의 조상으로 말한다면 이땅에서 수십 만년을 살았다. 그런 나무가 이깟 삼동 중의 반짝하는 날씨를 못 읽어 헛되이 꽃을 피울까. 개나리는 늘 봄에 피어왔다. 그러니 봄에 피는 것이 개나리의 생태가 됐다. 그러나 때로 보면 봄을 벗어나 초록이 무성한 여름날에 피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개나리들에겐 오랜 생태를 삐딱하게 비틀어보려는 내면이 있을지 모른다. 이 수많은 북쪽 울담의 개나리 중에서도 저런 삐딱한 가지가 하나 있다는 게 대견스럽지 않은가.
사람들 중에도 좀 삐딱한 사람이 있다.
남과 다르게 꽁지머리를 하고 사는 이가 있다. 종로 바닥에 갓 쓰고 짚신 신고 다니는 이가 있다. 콧수염을 기르는 이가 있다. 직장 생활이나 부부생활을 거부하는 이가 있고, 이성과의 결혼을 혐오하는 이가 있다. 남들 다 자식을 대학까지 기어이 졸업시키는 때에 공부가 인성을 해친다며 자식을 중학교까지만 가르치는 부모도 있다. 온국민이 휴대폰에 매달려 사는 것 같지만 어느 한 쪽에는 아예 휴대폰을 멀리하며 사는 이도 있다.
그들의 행위가 너무도 고귀해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의 그런 삐딱한 행위가 고귀한 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사는 방식과 달라지기 위해 내면에서 겪었을 크고 무서운 고뇌가 고귀하다. 꽁지머리를 기르기까지 그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모진 눈총과 험한 말을 들었을까. 꽁지머리는 그런 모욕을 극복해낼 준비가 되어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삐딱한 행복이다. 그러니 그런 삐딱함이 고귀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잘 아는 선배 중에는 이런 분이 있다. 그분은 평생을 양복에 넥타이로 살아온 단정한 분이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의복에서 나온다고 역설하시곤 했다. 실제 그분은 여행을 갈 때도 잘 세탁한 양복에 넥타이 차림을 하고 나올 정도로 정장만을 고집하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나이 육십을 반쯤 넘겼을 때다. 그것도 신년 모임에 놀랍게도 청바지에 두툼한 스웨터를 입고 나왔다. 그분은 평생 자신이 쳐놓은 옷의 경계를 그렇게 넘어선 거다. 그래서 멋있었다. 평생의 옷차림으로 본다면 그날의 의상은 삐딱하고도 남았다.
술이라곤 입에 대지 않던 꼿꼿한 분이 어느 날 모임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모습도 아름답다. 술에 취해 약간 흐트러진 그 모습도 아름답다. 허튼 말 한 마디 안 하시던 대꼬쟁이 같은 분이 어느 날 유머를 한답시고 좌중을 웃기는 모습도 아름답다. 평생을 친구들에게 밥 한 번 사지 않고, 술 한잔 내지 않던 이가 갑자기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놀란다.
그런 일은 대개 파격의 멋이다.
그러나 삐딱함은 파격보다 한수 위다. 일반 사람들과는 영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그 사회가 쳐놓은 보편적인 규범의 울타리 안에 갇혀산다. 그래서 우리들과 다른 사람의 외모나 행동을 보면 손가락질을 한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오랜 세월 내 방식대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왔다. 그러고도 내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는 삐딱한 이를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웃기게도 험담한다.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쉽게 사는 법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쉬운 삶의 방식은 삶을 금방 녹슬게 한다. 머리가 녹슨 개나리는 언제나 타성처럼 봄에만 꽃 피운다. 그러나 삐딱한 개나리는 다르다. 제 철을 벗어나 한겨울에도 꽃필 줄 알고, 한여름에도 꽃 피울 줄 안다.
클래식만 음악이라던 음악과 교수의 방에서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이 흘러나오던 일은 나는 잊지 못한다. 평생 자신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삶도 엄격해서 때로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람의 삶은 더욱 아름답다. 그것은, 인생이란 한 세계에서 낯선 다른 세계로 넘나드는 여행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 들어오는 대로 베란다에서 크는, 가지가 무성한 행복나무를 거실 한가운데에 들여다 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나뭇가지 때문에 허리를 굽히거나 빙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러나 삐딱한 즐거움을 누리려면 그만한 불편쯤은 감수해야 하지 않는가.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0) | 2014.02.02 |
---|---|
설 잘 쇠세요 (0) | 2014.01.30 |
외눈박이 행복 (0) | 2014.01.21 |
수녀님, 아침에 신문을 보았습니다 (0) | 2014.01.18 |
우리들 마음에 섬이 있다 (0) | 2014.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