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박이 행복
권영상
아내가 동창회를 하러 강릉에 내려갔다. 냉장고 속에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해 넣어놓고, 그러고도 미덥지 않은지 그릇마다 김치, 장조림, 멸치볶음, 시금치국.... 이런 쪽지까지 붙여놓고 갔다.
“당신 밥 때문에 어디 가려 해도 내가 꼭 이런다니까.”
아내는 그게 또 불만이었다. 알아서 챙겨 먹겠다는데도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 아내가 먹으라는 대로 밥을 잘 챙겨먹고 설거지까지 했다. 커피도 한 잔을 만들어 마셨다. 막 세수를 하고 나올 때다. 전화가 왔다. 아내의 절친한 학교 동창이다. 아니 아내의 동창이면서 또 내 후배이기도 한 분이다. 오늘 신문에 소개된 내 시를 잘 읽었다는 인사 전화였다. 그이는 아내와 동창이면서도 동창회에 못 가고 지금 집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근데 말입니다.”
그분의 용건을 다 듣고 난 뒤 나는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이에겐 치매질환에 걸린 아흔이 넘은 시어머니가 있다. 그 시어머니 병수발을 위해 30여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다. 남편의 형제도 자매들도 있다. 그들은 어머니를 요양 간병원에 보내기를 원했지만 후배인 그분은 처음부터 시어머니 간병을 자청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내를 통해 듣기도 하고, 아내와 하는 통화를 통해 듣기도 한다.
나이 60인 아들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이 아저씨, 못 보던 아저씨인데 왜 가까이 오느냐”며 이불 뒤에 가 숨으신단다. 며느리인 자신을 보고는 “아가씨”라 부르고, 손자인 아들들이 오면 “동네 깡패놈들!”이라 하신단다. 그러고도 성이 안 차면 주먹질을 하거나 닥치는 대로 눈에 보이는 걸 집어던지거나, 욕을 하신다는 거다.
아내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한두 달 모셔보면 손 드실 테지.” 그러며 후배의 자청을 탓했다. 건강한 시부모님 모시는 일도 다들 힘겹다 힘겹다 하는데 치매 걸리신 분을 모시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닌가.
사는 게 바쁘니까 후배의 일도 까맣게 잊고 살 때쯤 후배에게서 전화가 오곤했다.
“이번에 제주도 같이 놀러가기로 했는데 시어머니 때문에 못 간다는 이야기였어.”
전화를 끊자, 아내가 그 말을 했다. 후배는 오래전부터 아내와 함께 하는 모임의 일원이다. 방학이 되면 방학을 이용해 겨울여행을 하곤 했다. 근데 요 며칠 전에 시어머니가 휘두르는 방망이에 팔을 정통으로 맞아 골절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몸으로 여행가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거기다가 여행을 갈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 시어머니란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어딜 가는 낌새를 채면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거다. 그건 후배가 시어머니 병수발을 정성껏 하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면 갈 때마다 의사가 말한단다.
“이 할머니 돌아가실 일이 없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을 때면 후배의 인생이 내 인생처럼 가엽게 느껴졌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일이 없다면 이제 후배는 남은 생애를 시어머니 병수발에 바쳐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후배는 얼마나 마음이 답답할까. 오랜 직장생활을 벗어버렸으니 이제 자신의 생애에 대한 꿈을 즐겨볼 때다. 그런데 다시 시어머니라는 장벽과 마주 서게 되었다.
“참 힘드시겠어요. 남들은 저 좋은 해보자고 명예퇴직을 하고 나오는데 후배는 시어머니 공경에 매달려야 하니 고충이 얼마나 심하시겠어요?”
나는 후배를 위해 그런 말을 했다. 아니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1년도 아니고 벌써 3년을 넘게 병수발이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찍은 후배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가 무겁게 얹혀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대체 후배네 가족들은 뭐한대!”
내가 순간 화를 낸 건 후배의 일이 꼭 남의 일 같이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소년 적의 어머니는 무려 16년간이나 투병 생활을 하셨다. 그때 마흔 후반의 아버지가 홀로 겪으시던 우환의 고충을 나도 알기 때문이다.
“근데 선배님, 시어머니 모시는 게 힘들긴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뜻밖에도 내 위로의 말을 들은 후배가 그렇게 대답했다.
“건강하실 때 시어머님은 제게 너무도 다정하게 대해 주셨어요. 친구처럼 대해주시면서도 시어머니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시는 그런 분이셨어요. 제가 해드리는 음식은 뭐든 맛있게 잡수셨고, 제가 교직에 있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셨어요. 무엇보다 당신 자식들 이름은 몰라도 제 이름만은 또렷이 기억하신다는 게 신기해요. 며느리 이름 기억하기 쉬운 일 아니잖아요.”
나는 후배의 말을 들으며 후배가 왜 시어머니 병수발을 자청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3년이 넘도록 자신의 시간과 정성을 신에게 공물을 바치듯 희생하는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저번 겨울에 강릉에 일이 있어 하룻밤 자고 와 보니 시어머니 얼굴에 살이 쪽 빠지신 거 있지요?”
후배가 그런 말을 했다.
“90대 노인한테 빠질 살이 뭐가 있다고?”
나는 이해를 한다면서도 철없이 그런 말을 했다. 며느리를 고생시키는 그 치매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 해드리는 밥은 안 잡수신다는 거에요.”
그러는 그의 말속에 시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가득차 있었다. 하룻밤 밖에서 자고 돌아온 며느리의 눈에 시어머니의 살 빠진 얼굴이 보이려면 얼마만한 사랑이 필요할까. 젊은 날, 고부간의 충분한 인간적 교류와 교감이 있지 않고서는 그런 감정이 생겨날 수 없지 않을까.
후배와의 전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놓을 때 내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 후배에겐 그 일이 행복인 거야.’
후배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는 걸 행복이라고 믿는 게 분명했다. 그게 고역스러운 일이며 불행이라 생각했던 건 나였다. 직장을 중도에 퇴직한 뒤에 해외여행을 다니고, 평소에 못하던 취미생활을 하고, 여가를 즐기는 걸 나는 행복이라 생각했고, 후배는 내가 혐오하는 시부모님 간병에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쏟아붓는 일을 행복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너무도 세속의 바구니에 담긴 행복만이 행복인 줄 알며 살아왔다. 외눈박이로 한쪽의 행복만을 보며 살아왔다. 그쪽 바구니에 담긴 것이 행복의 전부인 양 그 바구니 속 행복만을 찾으려 했다.
그렇듯이 나는 여태껏 내 앞에 놓인 시간을 오로지 나를 위해 쓰려고 안달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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