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대중목욕탕이 그리운 계절이다

권영상 2014. 1. 7. 13:18

 

대중목욕탕이 그리운 계절이다

권영상

 

 

 

 

 

몸이 답답할 때면 가끔 대중목욕탕이 생각난다. 옷에 갇혀 살 듯 관습에 젖어 먹고살고 할 때 몸이 답답해한다. 이럴 때면 길을 가다가도 대중목욕탕의 붉은 벽돌로 지은 높은 굴뚝을 찾는다. 때만 벗기거나 잠시 피로나 풀 일이라면 집에서 물 받아놓고 몸을 담그면 된다. 그러나 이럴 때는 그 말고 좀 더 너른 공간이 필요하다. 사람들 앞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을 수 있는 공간.

 

 

 

대중목욕탕이 없어진 지 오래다. 전엔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갔었다. 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갔다. 부스스한 얼굴로 목욕탕 창구 앞에 선다. 요금을 내려면 허리를 잔뜩 숙여야 한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기 위해서인지 창구도 작고 또 낮다. 얼굴을 낮추고 요금을 내면 안에서 옷장 열쇠가 나온다.

옷장 열쇠! 열쇠는 작으나 마법의 힘이 있다. 대중 앞에 절대로 옷 벗을 수 없는 세상에서 자유로이 옷 벗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패스포트이다. 신발장에 내 신발을 넣고나면 우리는 스스럼없이 옷을 벗는다. 내 몸에 걸친 옷을 벗는 일은 어쩌면 낡은 내 일상을 벗어내는 일과도 같다.

 

 

 

 

대중목욕탕이 있을 때 우리는 그렇게 노동에 젖은 일상의 피로를 그런 방식으로 벗어버렸다. 그때가 지금처럼 추운 겨울이라면 내가 벗어 쌓아놓은 옷은 그야말로 한 짐이다. 그만큼 나는 위선적이었다. 도시 사람들은 다 그렇다. 그 한 짐씩이나 되는 옷으로 나를 위장하며 살았다. 하나의 몸뚱이 위에 여러 개의 낯선 옷을 바꾸어 입으며 나를 연출하듯 나는 여러 개의 얼굴로 살아왔다.

 

 

 

나는 하나 남은 나의 속옷을 벗는다.

이것마저 벗어내면 나는 세상 앞에 알몸으로 서게 된다. 나를 이토록 대범하게 만드는 건 무언가? 이제 막 발목에 차려는 고무줄 달린 옷장 열쇠이다. 그것이 나를 마법에 들게 한다. 나 말고도 쉬임없이 꾸역꾸역 들어오는 사람들, 그들도 아무 거리낌 없이 훌렁훌렁 옷을 벗어버리고 발목에 이 열쇠를 찬다.

자장면 값 정도의 요금만 내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알몸으로 버젓이 돌아다닐 수 있다. 그가 누구든, 목욕탕 바닥에 벌렁 누워 자든 말든 관여하지 않는다. 탕 주변을 꺼덕대며 걷는다 해도 탓하지 않는다. 세상에 이만큼 미덕이 관대하고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 이만큼 또 자유로운 곳이 있을까. 거기엔 타올 외에 아무 것도 손에 쥔 것이 없는 빈 알몸의 육신들뿐 신분질서가 없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벗은 채로 있기만 해도 편안하다. 배고프지 않고 세상 재물에 욕심낼 일이 없다.

 

 

 

 

 

그 점에서 제일 반가워하는 것은 세속의 물질에 잔뜩 위축된 내 몸이며 소박한 영혼이다. 이 속에선 고급 브랜드의 위세에 짓눌릴 이유가 없고, 비굴할 이유가 없고 기세등등할 이유가 없다. 여러 개의 얼굴로 나를 위장할 필요도 물론 없다.

몸이 불면 자리를 잡고 앉아 때를 민다. 저마다 수도꼭지 앞에 앉아 몸을 비틀어대며 때를 벗기는 군상들. 그런 소탈한 목욕 풍경에서 우리는 일찍이 서민의식을 배웠고, 누구나 벌거벗은 몸뚱이 하나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도 배웠다. 목욕탕 창구 앞에서 잔뜩 허리를 숙여 요금을 내는 겸손함도 배웠다.

 

 

 

 

옷장 열쇠를 되돌려주고, 이제 나는 목욕탕 현관 바닥에 내 신발을 던진다. 그 순간부터 나는 대중 앞에서 홀랑 옷을 벗어서는 안 되는 공간으로 들어선다.

우리는 또 인습을 요구하는 세상과 맞닥뜨려야 한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때, 목욕탕 밖의 세계로 걸어나올 때 내 뜨거운 몸에 부딪히던 바깥 공기의 신선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삶의 때를 벗어던지고 다시 태어나는 홀가분함이 바로 그런 기분이 아닐까.

요즘 같이 추운 날이면 한 짐이나 되는 옷을 벗어던지고 공중목욕탕 안에 들어서고 싶다. 어슬렁어슬렁 알몸으로 걸어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 그 곳, 신성한. 내 몸이 탈의의 자유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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