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에 난 발자국들
권영상
아침에 창문을 여니 햇빛이 함뿍 쏟아져 들어옵니다. 간밤 내내 눈이 왔는데 익살맞은 사기꾼처럼 아침 하늘이 파랗습니다. 아침밥을 지어먹고 방바닥에 앉아 서울에서 들고 온 묵은 신문을 들추는데 휙 창문으로 그림자가 지나갑니다. 새 그림자입니다. 문에 날아가는 새 그림자가 비치면 손님이 온다는 말이 예부터 있었습니다.
나는 얼른 신문을 접고 방청소를 했습니다. 이 시골에 나를 찾아올 이 누가 있을까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빗자루를 들었습니다. 방청소랄 게 뭐 크게 없습니다. 어수선한 책상 위의 책들을 정리하고, 여기저기 뽑아 쓴 휴지, 까먹은 귤껍질, 그리고 수북이 쌓인 간밤의 소박한 꿈들.......
옛 사람들은 잠시 앉아 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사는 집 앞으로 날짐승 지나가기 예사지, 그걸 가지고 또 손님에 오네 마네하며 집안 식구들을 못 살게 굴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마치 옛날에 놓여있는 사람처럼 대충 집정리를 했습니다.
그러고 마당에 나서니 몸이 한결 가뿐합니다. 볕도 곱고, 날씨도 푸근합니다. 눈 끝에 거지들이 개울에 나와 빨래를 한다는 말이 참 맞습니다. 데크 난간에 올라앉아 건들건들 다리를 흔들며 눈 뒤의 포근한 볕을 즐깁니다. 그러다가 논벌에 나갔습니다. 논벌에 뭐 숨겨놓은 금덩이라도 있는 것처럼 내 발걸음은 벌써 벽장골 언덕에 올라섰습니다. 마법에 걸린 무대처럼 세상이 온통 새하얗군요. 넓은 고래골 논벌도, 무를 심었던 벽장골 밭들도, 경사가 비스듬한 고구마를 심었던 산비탈 밭들도 하얗습니다. 그 하얀 벌판이 햇빛에 눈이 부시도록 반짝입니다.
나는 천천히 고래골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직 이 길을 간 사람이 없습니다. 새 눈을 뽀독뽀독 밟으며 첫길을 내며 걷습니다. 처음 길을 내며 가는 일은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그것에 이 세상에 눈곱만한 발자국을 내는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설레이게 하지요. 꼭 눈빛이 차고, 공기가 차고 서늘하기 때문만은 아닌 듯 합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희고 넓은 벌판과 마주 서서 그 한복판으로 내가 첫길을 내며 걸어 들어간다는 일 때문이겠지요.
앞서서 길을 낸다는 일은 사람을 흥분하게 합니다. 그 일은 매우 급진적일 수도 있어 위험에 직면하기 쉽고, 그 일은 남들의 박수를 받기 쉬우나 오만에 빠져 추락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길을 내기 위해 그 길 위에 서서 용렬한 힘을 쓰며 나가지만 결국은 다른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버리고 맙니다. 그래야지요. 우리는 위인이 아니니까요. 그런 시도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값지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내가 고래골 벌판을 향해 첫길을 내고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나 말고 먼저 이 길을 간 이가 있네요. 고라니거나 노루들입니다. 그들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네요. 이들이 눈 그친 이후의 달빛을 타고 이 길을 갔거나 아닌 새벽빛을 받으며 이 길을 달려갔겠지요. 도랑둑을 마구 뛰다가 탁 멈추었는지 발자국 끝에 검정 흙이 파헤쳐져 있습니다. 한 마리가 아닙니다. 여러 마리입니다. 달빛 차가운 눈 위를 겅중겅중 뛰며 자유를 누렸겠지요. 그도 아니면 서로 정분이 맞아 뛰어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정분의 힘이란 신통합니다. 별 싱거운 일에도 재미있어 못 견뎌하고, 별 대수롭지 않은 말마디에도 비명을 지르듯 웃고 떠들도록 합니다. 그런 힘으로 이 길을 뛰어갔겠지요.
달밤을 즐긴 건 네 발 짐승만이 아닙니다.
자박자박 걸어 다닌 새 발자국도 보이네요. 브이자 발자국을 내며 뽀독뽀독 눈 위를 걸었습니다. 이들도 나무 위 둥지나, 논둑 마른풀 덤불에 옹크리고 자다가 쏘는 눈빛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둥지를 나와 쏘다녔겠지요.
나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새들 발자국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따라가 봤습니다. 논벌에 나 있는 물웅덩이였습니다. 이상하게도 거기만 유독 물을 풀어놓은 웅덩이가 있습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넋을 놓고 웅덩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물웅덩이를 드나든 새들 발자국 좀 보세요. 이 들판의 모든 발자국들이 이곳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프리카의 물웅덩이에 찾아든 수많은 야생동물들의 발자국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논벌의 물웅덩이는 야생동물들의 우물터였습니다.
나도 물웅덩이가 있는 논에 내려섰습니다. 다른 곳은 다 얼었는데 그곳만 눈이 녹았고, 그곳만 물이 펀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들고 간 스틱으로 논을 찔러보았습니다. 쑥 들어갑니다. 수렁이네요. 발을 디디면 한정 없이 빠지는 물 수렁.
여기가 야생짐승들의 물 공급지인 모양입니다. 추운 밤, 기갈을 참을 수 없는 새들이나 네발짐승들에게 물마시라고 열어놓은 우물입니다. 어디에서나 생명이 사는 곳에는 그들 생명을 지켜줄 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이 논벌의 물웅덩이는 그때를 위하여 마련된 겨울의 오아시스인 셈입니다.
누가 이곳으로 찾아오는 길을 제일 처음 냈을까요. 그는 눈으로 하얗게 지워진 이 들판에서 희미한 기억으로, 아니면 그만의 물을 찾는 본능으로 이 길을 내고 왔겠지요. 지금은 오고간 발자국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필시 처음에는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길을 냈을 테지요.
물웅덩이에서 나와 길에 올라섭니다.
논벌을 돌아 집에 와 보니, 마당 의자에 편지가 와 있습니다. 이동통신사에서 보낸 고지서입니다. 창문을 스쳐지나간 새 그림자가 우편물을 전해주는 손님을 불러들였군요. 이 외딴 데서는 그분의 발자국소리만 들어도 반갑습니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중목욕탕이 그리운 계절이다 (0) | 2014.01.07 |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 | 2013.12.31 |
크리스마스 선물 (0) | 2013.12.23 |
세계를 웃게 해준 아프리카의 익살 (0) | 2013.12.16 |
유일한 그리움의 통로 (0) | 2013.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