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동화 참깨동화

나그네가 된 나무와 나무가 된 나그네

권영상 2012. 6. 20. 15:00

 나그네가 된 나무와 나무가 된 나그네

                                       권영상

 

 

 

한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에 바쳤습니다. 모든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가 왜 나그네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아마 타고 날 때부터 건강한 몸을 지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는 튼튼한 발과 다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성처럼 무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강가에서 자란 나그네는 어렸을 적부터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걸 배웠습니다.

‘대체 이 강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나그네는 그런 일에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호기심은 먹고 살아가는 데엔 별 도움이 되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어른이 되도록 그런 호기심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대체 이 강은 어디로 흘러가 어디에서 사라지는 걸까?’

나그네는 강이 끝나는 곳을 찾아 걷기도 했습니다.
나그네는 힘이 들고 고달팠지만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그네가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 바닷길을 따라 며칠을 걸은 적도 있습니다. 밤이 되면 파도 소리를 들으며 별을 만나고, 그 별을 바라보며 모랫벌에 누워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나그네는 별을 보며 이런 생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저 많은 별들은 누구와 함께 태어나는 걸까?”

나그네는 생명이 태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나그네는 아기를 낳아 금줄을 친 집도 본 적이 있습니다. 또 어떤 마을에서는 꽃상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마음씨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집에서 하룻밤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나무숲을 만나면 나무숲에서, 들꽃숲을 만나면 들꽃숲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소 장수의 소를 얻어 타고 갈 때에는 소의 잔등에서 선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나그네는 생각이 닿은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높은 산을 보면 그 산을 넘고야 맙니다. 오르다가 힘이 들면 산에서 잠을 자고 산에서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산의 꼭대기를 눈으로 확인합니다. 산의 꼭대기에 오르면 그 꼭대기보다 더 높은 곳이 드러납니다. 푸른 하늘입니다. 나그네는 이 세상의 끝이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길을 걷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끝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그네의 마음에는 끊임없이 그런 생각이 일었습니다.
그런 나그네의 마음을 알아챈 한 사람이 귀띔을 했습니다.

“이 나라의 남쪽 끝에 가면 훌륭한 철학자가 있다네. 그에게 물어 보게.”


나그네는 철학자를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난 길을 걸었습니다. 오랜 여정 끝에 나그네는 철학자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나그네의 질문을 받은 철학자는 난처했습니다. 머뭇거리던 철학자는 눈을 감았습니다. 눈을 감은 철학자의 얼굴에는 굵은 주름살이 살아온 나이만큼 그려져 있습니다. 잠시 후, 눈을 뜬 늙은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이 길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네.’

그의 목소리는 엄숙했지만 슬픈 빛이 보였습니다.
철학자의 말을 들은 나그네도 슬펐습니다. 그가 일생을 바쳐 걸어온 길이 그렇게 끝나게 되고 말다니…….
나그네는 무거운 걸음으로 철학자의 집을 나왔습니다. 작은 오솔길 끝에 난 조그마한 우물가에 다다랐습니다. 우물 속을 들여다봤습니다. 나그네는 거기에서 힘겹게 걸어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포동포동하던 소년의 얼굴은 사라지고 주름진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나그네의 마음은 슬펐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가는 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그네에겐 걸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그네는 한없이 길을 걷다가 산자락에 드리워진 커다란 나무 그늘을 찾아갔습니다.

‘아, 이젠 너무 피곤하구나. 걷는 일조차’

아무리 튼튼한 발과 다리를 가진 나그네라 해도 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나그네는 나무를 어루만지며 힘없이 나무를 쳐다봅니다. 나무를 어루만지던 나그네의 입에서 무심히 말 한 마디가 새어 나왔습니다.

“나무가 되고 싶구나!”

그 말은 이젠 한자리?머물러 쉬고 싶다는 나그네의 감추어진 마음일지 모릅니다.
그 때 조용히 서 있던 나무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나는 나그네가 되고 싶다오.”

그건 분명 나그네가 어루만지고 있는 나무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나그네처럼 욕심 없이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면 나무의 말을 듣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그네가 물었습니다.

“나는 많은 세월을 한자리에만 붙박혀 살아왔다오. 새들이, 때로는 바람이 들려 주는 세상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젠 그것들을 내 눈으로 보고 싶다오.”

나무는 나그네만큼 나이가 들어 보였습니다. 금방이라도 발걸음을 떼어 놓고 싶은 듯 나무는 온몸을 떨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나그네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담 나랑 바꾸어 살면 어떻겠는가?”

“나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오.”

나그네는 옷과 신발을 벗어 나무에게 주었습니다. 나무는 가지와 잎과, 둥치와 뿌리를 벗어 나그네에게 주었습니다.

이제 나무가 되고 싶었던 나그네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그네가 되고 싶었던 나무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나무가 된 나그네가 나그네가 된 나무를 보고 말했습니다.

“3 년 뒤 여기에서 다시 만나는 게 어떻겠는가?

“그건 무슨 뜻이지요?

나그네가 된 나무가 물었습니다.

“혹시 당신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를 테니까 말이오.”

‘그러니까 마음이 변하면 다시 옷을 바꾸어 입자는 말인가요?”

“당신을 위해서.”

“나도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군요.”

그리고는 나그네가 된 나무는 길을 떠났습니다.

나그네는 새와 바람이 들려 주던, 바다와 아름다운 호수와 높은 산들을 차례로 찾아다녔습니다. 바다는 새들에게서 듣던 것보다 더 넓고 푸르렀습니다. 바닷속에는 너무나 많은 고기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항구를 찾고서야 알았습니다. 나그네는 생각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소중한 생명들이 살고 있구나.’

호수를 찾았습니다. 호수는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노을이 질 때면 호수 위로 내려 쌓이는 붉은 노을이 나그네를 놀라게 했습니다. 다음에는 높다는 산도 찾아갔습니다.
나그네는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붐비는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마을에서 나그네는 헐벗은 채 울고 있는 가엾은 아이를 만났습니다. 부모를 여읜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오랜 날을 굶은 모양입니다. 깊은 병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얼굴엔 핏기가 없고 거기다 한쪽 다리까지 절름거렸습니다.

나그네는 그 아이를 위해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렸습니다. 거두어들인 곡식으로 아이를 먹이고, 헐벗은 옷을 성한 옷으로 갈아입혔습니다. 아이가 밖으로 나가려면 나그네의 손과 발이 필요합니다. 나그네는 그를 위해 가끔씩 바깥으로 나가 봄과 가을이 오고 가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세요.”

어느 날, 아이는 나그네를 보고 수줍게 말했습니다.

“그래, 내 아들이 되어 다오.”

나그네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약속한 3 년이 다가왔습니다.

“얘야, 며칠만 기다려 다오.”

나그네는 그렇게 말하고는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약속한 장소로 향했습니다. 약속한 장소는 너무나 멀었습니다. 그것은 나그네가 걸어온 길이 너무나 멀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피곤한 몸으로 나무를 향해 걸었습니다. 열흘의 낮과 열흘의 밤을 걸어 나그네는 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저만큼 나무가 보입니다.

 

그러나 나무는 나그네가 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나 봅니다. 조용히 서 있는 나무는 나뭇잎 한 장도 까닥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가지들을 가지런히 늘어뜨려 마치 우주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너그러운 성자의 모습이야.’

나그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무에게로 다가갔습니다. 피곤한 나그네는 그 나무의 커다란 그늘 속에 들어섰습니다. 그늘이 샘물처럼 시원합니다. 또한 잔잔한 우주처럼 아늑하고 조용합니다.

“주무시고 계시나요?”

나그네가 나무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 나무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리고 친근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피곤한 당신의 몸에 시원한 힘을 불어넣을 준비를 하고 있다오. 자, 이제 내 그늘에 앉아도 좋소.”

나그네는 나무 그늘에 앉았습니다. 온몸의 피로가 사라지고 몸은 다시 이슬에 젖은 풀잎처럼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만에 나그네가 말했습니다.

“혹시 3 년 전, 나그네가 되고 싶어한 나무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눈을 감고 있던 나무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은 나무가 되고 싶어한 나그네를 잊지 않으셨겠지요?”

그 말에 나그네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참 만에 나무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나무가 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깨달았소.”

나그네가 물었습니다.

“그 깨달은 이유란 대체 무엇이지요?”

“내가 가진 그늘로 사랑을 베푸는 것이오.”

나무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피곤한 몸으로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기에 나는 여기 서 있을 이유가 생겼소. 외롭지만 행복하다오.”

“나도 그렇다오.”

“무슨 이유가 있기에 당신도 행복하다는 거지요?”

나무가 조용조용히 물었습니다.

“내가 돌보아야 할 가엾은 아이가 있다는 게, 힘들지만 나를 행복하게 한다오.”

나무가 된 나그네와 나그네가 된 나무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둘은 그 사이에도 서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나무가 된 나그네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 그 아이가 어른이 될 십 년 후에 다시 만나는 게 어떻겠소?”

“좋소. 당신 말처럼 그 아이에겐 내 손이 필요하다오.”

십 년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나그네가 된 나무는 나무가 된 나그네의 곁을 떠났습니다. 나무는 떠나가는 나그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줍니다. 나그네도 성자처럼 서 있는 나무에게 손을 흔듭니다.
그 뒤 세월은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이 만나야 할 약속의 시간은 멉니다. 나무가 된 나그네는 오들도 남쪽의 어느 산자락에서 지친 나그네들을 기다립니다. 나그네가 된 나무도 어느 마을의 야트막한 집에서 지금도 가엾은 아이를 보살피고 있습니다. <끝>



<지은이 소개> 권영상

1953년 강원도 강릉의 호숫가 마을 초당에서 태어나 ‘소년중앙’ 문학상과 ‘한국문학’ 신인상 등을 수상하며 시와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세종아동문학상, 새싹문학상, MBC동화대상을 받았다.

배문중학교 교사이기도 한 지은이는 ‘숨쉬는 말촉마을’, ‘춤추는 원숭이’, ‘내 별에는 풍차가 있다’, ‘다락방 코끼리 아저씨’ 등 10여 권의 작품집을 냈다.

권영상 동화집 <물오름마을의 겨울눈>(국민서관) 중에서
<소년한국일보>입력시간 : 2004-05-05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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