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동화 참깨동화

쥐라기 아저씨와 구두 1

권영상 2012. 6. 27. 17:06

쥐라기 아저씨와 구두

 

권영상

 

 

 

 

 

 

 

 

얼른 보기에도 동네가 낡고 후줄근합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가로수 너머로는 나지막한 슬레이트 집들이나 아니면 오래 된 단층짜리 집들이 빼곡합니다. 한길을 따라 동네로 들어가는 전신주에는 거미줄처럼 전깃줄과 전화선들이 얽혀 있습니다. 길은 시멘트 기운 자국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오래 된 도시의 오래 된 동네인 듯합니다.

 

가로수들은 나이가 많습니다.

성큼성큼하게 덩치가 큰 집들의 옥상엔 벗겨진 페인트 자국이 흉합니다. 깨어진 유리창은 베니어 판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만한 동네면 아주 오래 전엔 괜찮은 곳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거나, 동네를 가로지르는 한길의 옆구리에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구두 닦는 가게가 있습니다. 그곳을 가게라고 불러도 좋을 겁니다. 구두도 닦지만 구두 깔창이나 구두 뒤축도 갈아 끼워 주니까요.

구두 가게라지만 고양이 혓바닥만한 가게입니다.

 

허리를 세울 수 없을 만큼 낮습니다.

쥐라기 아저씨는 거기에 삽니다. 구두닦이 아저씨입니다. 나이가 오십이 넘은 분들 얘기로는 쥐라기 아저씨가 이 동네에서 구두를 닦은 지가 30년은 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언제 보아도 초록색 챙이 달린 모자에 푸른색 작업복 차림입니다.

 

이 마을에 오래 사신 분들도 쥐라기 아저씨의 이름을 모릅니다.

그저 공룡처럼 생겼다고 해 ‘쥐라기 아저씨’라고 부를 뿐입니다. 키가 작고 목이 긴 데 비해 엉덩이가 깊숙이 빠졌습니다. 물론 다리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짧은 편입니다. 누가 이런 이름을 붙여 주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쥐라기 아저씨네 가게를 들러 본 사람들만이 어렴풋이 알 뿐입니다.

 

 

싸늘하게 추운 오후입니다.

아침부터 추웠습니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플라타너스 잎들이 힘없이 툭툭 떨어집니다. 후르르,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가지에 남은 플라타너스 잎들이 날립니다. 수를 잘 놓은 손수건처럼 붉게 물든 잎들이 떨어져 내립니다.

바람이 휙 날아옵니다. 찬바람 때문에 유리문을 조금 더 닫으려고 쥐라기 아저씨가 움씰 했습니다.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누군가의 발이 가게 앞에 뚝 멈춥니다.

 

 

짙은 회색 바지에 하얀 고무신을 신은 발입니다. 춥게 보입니다. 세상을 오래도록 살아온 이의 다리처럼 땅을 밟고 선 힘이 약해 보입니다. 윗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발만 보고도 발의 임자를 알 수 있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발의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여보시게, 쥐라기 선생.”

틀림없이 그분입니다. 여태껏 이 쥐라기 아저씨를 보고 ‘선생’이라고 부르는 이는 그분밖에 없습니다. 쥐라기 아저씨는 밖으로 나가 그분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드립니다. 머리카락이 하얀 할아버지입니다. 두 달이나 석 달이면 꼭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할아버지는 예의 그 고동빛 보따리를 들고 오셨습니다.

석 달만입니다. 몸이 수척합니다.

“안녕하신가?”

할아버지는 소중하게 들고 계신 보따리를 아저씨에게 건넵니다.

“들어가시지요. 날씨가 싸늘합니다.”

두툼한 점퍼를 입으셨지만 추워 보입니다.

할아버지는 가게 안 의자에 가뿐히 앉으십니다. 구두약 냄새가 흠씬 풍깁니다. “올핸 겨울이 일찍 오는구먼.” 쥐라기 아저씨는 할아버지가 들고 오신 보따리를 조심스레 풀었습니다. 꺠끗한 구두 한 켤레가 나왔습니다. 겉보기엔 꺠끗하지만 구두는 낡았습니다.

 

 

 

쥐라기 아저씨는 이 구두의 내력을 잘 압니다.

“이 구두의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지요?”

마디가 툭 불거진 손을 비비시던 할아버지가 낙엽이 구르는 창 밖을 봅니다.

“48년에 휴전선을 신고 넘어온 구두라네. 그 때 내 나이 서른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스르르 눈을 감습니다. 자나온 시간 속에 잠기시듯 지그시 눈을 감습니다. 감은 눈 곁으로 잔주름이 어둠처럼 달아붙어 있습니다.

 

쥐라기 아저씨가 이 동네에서 구두 닦는 일을 하면서부터 만난 분입니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이 가게를 찾으신 지도 오래 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혼자 월남을 하셨습니다.

부모와 자식들과 아내를 둔 채로. 아흔이 넘으셨을 부모님이 지금도 살아계시라라고 할아버지는 믿고 계십니다.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만나는 것은 할아버지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남북의 문이 열리면 이 구두를 신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월남할 떄 신고 온 이 신발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시겠다는 거지요.

 

그런 이유 때문에 할아버지는 이 구두를 신지 않으십니다. 닦기만 해서는 고이 보관하시는 겁니다. 그러신 지가 벌써 수십 년이 됐고, 서너 달이면 어김없이 할아버지는 쥐라기 아저씨의 가게를 찾으시는 겁입니다.

쥐라기 아저씨는 그런 할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압니다. 그러기에 더욱 공들여 구두를 닦습니다. 구두약을 진하게 먹입니다. 그 구두약이 구두 가죽으로 깊이 스며들게 한 뒤 헝겊으로 문지릅니다. 그리고 다시 얇게 약을 먹여 꺠끗한 빛을 만듭니다.

 

쥐라기 아저씨의 이런 모습은 마치 굉장한 일에 몰두하는 장인과 같습니다.

하찮은 구두를 닦는 일이지만 온 몸으로 정성을 들여 그 어두운 가죽 위에 빛을 만들어 놓으십니다. 빛을 내기 위해 목을 길게 뽑고, 그러기 위해 엉덩이를 충분히 의자에 앉힙니다. 쥐라기 공룡의 모습처럼.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아저씨는 더욱 반짝이는 빛을 만들어 드립니다. 오직 할아버지의 구두를 위해 이 가게 일을 하시는 것처럼.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구두 밑을 털다가 닳은 구두의 뒤축을 바라봅니다. 휴전선을 넘어오신 그 길과 험난하게 사셨던 할아버지의 삶이 그대로 보이는 듯합니다. 구두 뒤축의 가장자리들은 닳을 대로 닳아 있습니다. 구두 가죽으로까지 닿을락 말락 합니다. 할아버지의 살아오신 나이가 그 어느 선에 이제는 닳을락 말락 하듯이 그렇게 구두 뒤축은 닳아 있습니다. 닳아 올라간 뒤축의 모습은 볼수록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구두 끈에도 한 번 더 손길을 줍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고동색 보자기에 가지런히 구두를 쌉니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감았던 눈을 뜨고 일어섭니다. “자, 선생. 여기에.” 아저씨는 두 손으로 공손히 구두삯을 받습니다. “그럼, 안녕히.....” 문을 열고 나가 구두 보따리를 드리며 아저씨는 겨울 인사를 합니다.

 

 

골목을 돌아가시는 할아버지의 뒤에 남아 아저씨는 문득 손을 폅니다. 50원짜리 동전 하나가 외롭게 반짝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로부터 받아 온 구두삯입니다. 그것은 쥐라기 아저씨의 고집이며, 할아버지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지키시는 것입니다.

 

바깥이 어두컴컴합니다.

하나 둘 켜지는 거리의 불빛을 보며 아저씨는 가게 안으로 들어섭니다. 구두약 냄새가 훅, 하고 온몸으로 끼쳐 옵니다. 불을 켭니다. 작은 전등 빛에 놀라 삣-,하는 새 울음이 들립니다.

참새 치오입니다.

 

아저씨네 구두 가게 천장 구석, 빛이 스며들어오는 곳이 치오네 집입니다. 올 늦은 봄, 길거리에 개나리꽃이 시나브로 져 가던 때, 동회의 볼일을 보고 나오다가 치오를 만났습니다. 치오는 개나리 덩굴 속에서 바둥거리고 있었습니다. 덩굴을 헤치고 꺼내었습니다. 제법 깃털이 나 있었지만 후우 - , 입김을 불면 살갗이 빨갛게 드러나는, 날지도 못하는 어린 녀석이었습니다.

 

그가 ‘치오치오’ 울며 데려가 주길 바랐습니다. 그걸 데려와 쥐라기 아저씨는 한줌 쌀알로 키운 것입니다. 어느 정도 날개가 다 자란 뒤 날려주어도 치오는 날아가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