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오늘 아침 진심으로 겸손하고 싶다

권영상 2013. 11. 24. 09:20

 

오늘 아침 진심으로 겸손하고 싶다

권영상

 

 

 

 

출근을 하느라 전철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다.

전철역 근처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낡은 검정구두 아니면 껍질이 벗겨진 군화에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다.
“이 X새끼 이래 기다려도 안 오니 낼부턴 교체해야겠어요!”
그중 한 사내가 휴대전화에다 대고 짜증섞인 말로 소리치고 있다. 건설공사를 하러 가느라 아직 안 오는 인부를 기다라는 모양이다.

 

 


나도 예전 10대 중반엔 건설공사 공사장에 늘 나갔다. 갑자기 어머니가 병원에 장기 입원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진학을 못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 병원 비용을 대느라 바쁘셨으니 내게 관심을 두실 여가가 없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입원은 멀쩡하게 학교에 다니던 내게 꽤나 심각한 충격이었다. 미친듯이 들판을 뛰닫고, 미친듯이 헤엄쳐 바다에 들어가고, 미친듯이 하룻길을 걸으며 나를 혹사해 봤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럴 때 마을에 대학이 들어섰다. 나도 모르게 나는 그 대학신축 공사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돈 보다는 진학을 못한 울분을 풀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때 막노동과 함께 술을 배웠고, 담배를 배웠었다. 그랬으니 꾸준히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공사장을 들락거렸다. 어른 만큼 키가 크고 힘이 있었던 나는 일이 끝나면 마을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내가 다니던 신축공사장엔 나 말고 다른 친구도 있었다. 그 중에는 나보다 나이는 많지만 내 후배인 만중이도 있었다. 그는 근방에서 소문난 부잣집 담장 너머 늙은 감나무 밑에 살았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가진 땅도 없어 남들처럼 부쳐먹을 논밭이 없었다.
우리는 3층 건물 위로 시멘트를 져나르거나 질통에 모래를 가득가득 메어 날랐다. 철판 위에선 모래와 시멘트를 섞는 삽질도 했다. 그러니까 아무런 기술이 없던 우리들은 주로 잡일을 하였다.

아침을 먹으면 나는 껍질 벗겨진 붉은색 군화를 신고 끈을 조였다. 공사장에 나가는 내 입은 험했다. 뭣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는 내 삶 자체가 불만스러웠다. 더구나 젊은 내게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내 속은 울분으로 부글거렸고, 나는 걸핏하면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공사장 일이 막 끝나가는 어수룩한 저녁이었다.

“술 한 잔 하러가자!”

나는 내 친구 만중이를 불러세웠다. 그는 못 간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에게 버럭 화를 냈다. 어떻게 번번히 술 자리를 피할 수 있느냐고. 그러자 그가 들고 있던 삽을 공사장 철판 위에 메어던졌다. 삽이 튀어오르며 두 동강이 났다.
“너는 술값하러 여기 오지만 나는 우리 집 먹여 살리려고 와. 너 같은 놈이 알기나 하냐!”
그는 독기어린 목소리로 나를 쏘아붙이고는 홱 가버렸다.

 

 

 

나는 그후로 서른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와 내가 가는 길이 처음부터 다르다는 사실에 나는 고통스러웠다. 박경리 선생께서 두고간 시집 <우리들의 시간> 속,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백성’들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오늘 하루 진심으로 겸손하고 싶다.

 

(교차로신문 2012년 10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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