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오빤 강남스타일'에 거는 기대

권영상 2013. 11. 2. 21:07

'오빤 강남스타일'에 거는 기대

권영상

 

 

 

 

 

“당신도 한 번 춰 봐!”

아내가 인터넷에서 “오빤 강남스타일”을 꺼내 튼다.

화분에 물을 주던 나는 싱겁게 다리를 흔든다. 아내가 다리를 꺼덕대는 나를 보고 웃는다.
“괜찮어?”
새가난 나는 물조리개를 들고 거실로 들어와 ‘말춤’ 같지 않은 말춤을 춘다. 그냥 한번 웃겨보고 말리라 했는데 내 몸이 노래를 따라 자꾸 겅중댄다. 내 입은 싱겁게 ‘오빤 강남스타일’을 외쳐대고. 나는 바보 남편처럼 거실을 오가며 겅정겅정 춤을 추다 그만 주저앉았다. 힘들다.

 

 

 

 
“싸이보다 훨씬 낫네 뭐.”

손뼉을 치던 아내가 이번엔 꺼덕대던 내 춤 흉내를 낸다. 우리는 그러며 한참을 웃었다.
저녁에 아내가 슈퍼에 나간 틈을 타 “오빤 강남스타일”을 다시 꺼냈다. 내가 춤을 추자는 게 아니라 그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싶었다. CNN에서 방영되었다거나, 유튜브 5천만 건 조회라는 기록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다면 분명 기적적인 일이다.

 

 


처음 이 뮤직비디오를 봤을 때 이게 무슨 춤개그거니 했다. 춤개그가 아니고 대중음악이란 말을 들었을 때도 내 머리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래가 그랬고, 그들의 춤이 그랬고, 또한 노랫가사가 그랬다.
지하주차장에서 시작되는 이 노래의 배경은 체육관, 놀이공원, 버스, 마굿간, 목욕탕, 엘리베이터, 지하철, 변기, 해변가 파라솔 등으로 옮겨간다. 이런 장소들은 기존의 뮤직비디오들이 기피하는, 시시한 장소다. 노래의 품격이 전락될까 두려워하는 배경들이다. 춤은 어떤가?
우리가 알고 있는 돈 들여 뽑아낸 그런 춤이 아니다. 말춤이라 하지만 말춤을 빙자한 한없이 섹시한 춤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지만 나는 위대한 강남 스타일! 그쯤 알어! 뭐 그런 식의 같은 리듬이 반복되는 노래다. 노래라면 노래고 개그라면 개그다.


 

 

 

 

강한 제스처를 쓰면서 “오빤 강남 스타일! 강남스타일!”을 외치는 노래는 ‘눈보라’에 저항하듯 뭔가 현실에 저항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강남’은 이들 세대에게 어떤 대상이었나? ‘강남불패’ 신화는 이들 3,40대의 학창시절을 괴롭혔던 독종같은 괴물이다. 이들은 강남이라는 특권, 그들만의 부와 권력을 바라보며 그 부조리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냈다.
어쩌면 그 아픔이 기존의 대중음악이라는 음악적 질서를 깨고 변종으로 출현한 이 ‘오빤 강남 스타일’일지 모른다. 잘 빠진 몸과 얼굴을 가진 기존의 소녀 그룹 가수들에 대한 도전이라면 이것 또한 너무 과한 표현일까.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대중음악은 잘 만들어진 몸과 잘 만들어진 노래와 잘 만들어진 춤에 식상하며 여기까지 왔다. 이 노래가 단번에 우리를 열광하게 한 원인은 이것들을 한방에 뒤집었다는 점이다. 잘 다듬어진 몸이 아닌 우락부락한 몸, 외국인 취향을 고려한 맞춤 노래이가 아닌 술집이나 회식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추는 즉석춤, 뭔가 좀 어색한, 뭔가 연습이 덜 된 듯한 촌스러움 때문이다.

 

 

 

 

그 좀 모자라는 듯한 촌스러움이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완고한 부와 권력과 기존의 가요판을 두드려 깨고 있다. 그게 왜 즐겁지 않은가. 바라건대 좀 못 생긴 얼굴, 좀 못 생긴 몸매, 좀 찌그러진 노래, 좀 못 하는 공부, 뭐 하나 잘 하는 게 없는 내 친구들도 활개치며 살 수 있는 그런 나라를 기대해본다.

(교차로신문 2012년 8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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