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의 여름 관전기
권영상
갑작스레 하늘이 새파래지고 날이 선선해졌다. 한강을 건너며 반포아파트 쪽을 바라본다. 드문드문 선 나무들이 시퍼렇다. 봄에 보여주던 예쁘고 산뜻한 초록이 아니다. 연둣물이 다 빠진 검정에 가까운 초록이다. 기온 탓인지 아파트와 어울리기는커녕 오히려 초라해 보인다.
전철에서 내려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길에서 마주 보는 가로수들도 꺼칠하다. 지난 날의 늠름함은 간 곳 없고 권투시합에 패하여 링에서 막 내려온 선수들같이 초췌하다.
지난 여름은 잔인했다.
폭염, 폭우, 폭풍이라는 3종 무기를 들고 달려와 이 땅을 휩쓸고 갔다. 여름은 링 위에 올라서자마자 우리들의 턱밑에 제일 처음 폭염을 날렸다. 그의 펀치는 강했다. 우리가 여태 겪어보지 못한 섭씨 40도에 가까운 펀치였다. 그의 주먹은 연일 요란하게 전국을 강타했다. 17일 동안이나 숨쉴 틈도 없이 연속적으로 주먹을 휘둘러댔다. 밤에는 열대야라는 펀지로 헉헉대는 대지와 사람들을 가격했다.
“70평생을 살아봤지만 이런 경기는 처음 관전합니다.”
여름을 관전하던 제주의 한 관전자는 방송사 인터뷰에서 이렇게 경악했다.
70년 이래 처음으로 이땅에 상륙한 폭염은 기록경신에 신들린 주먹잽이처럼 쉬임없이 분투했다. 인간이 문명! 문명!을 연호하며 그 문명에 몰입하는 동안 문명이 배출해낸 co2 덕분에 폭염은 오만해질대로 오만해졌다.
그때 내게 소원이 있었다.
"이제 그만 비라도 한 방울 내려 주소서."
내가 그것을 기원하고 있을 때 여름은 기다렸다는 듯이 폭우라는 무기를 들고 달려왔다. 비도 비도 아주 무서운, 공포 영화에서나 볼만한 그런 폭우. 폭우는 우리의 전신을 강타하여 인정사정없이 물바다 속에 쳐박았다.
역시 여름은 강자다웠다.
날로 날로 세상 끝 모르게 진화하는 맹수와 같았다. 그에게서 신사다운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폭염으로 지쳐 쓰러진 자들을 일으켜 세워 맹렬한 카운트 펀치를 날렸다. 그는 야성적이며 또한 승부사 기질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는 시간당 50밀리, 하루 300밀리 또는 그 이상의 강한 우량으로 우리를 숨막히게 괴롭혔다. 그 펀치에 동네 방죽이 힘없이 무너졌고, 산사태가 지붕을 덮쳤고, 멀쩡한 길이 왕창 끊겼다. 그 바람에 3종 경기에 아무 관심도 없는 앰한 목숨들만 우리는 잃고 말았다.
폭우가 가자, 이번엔 미친 폭주족처럼 태풍 볼라벤이 찾아왔다. 초속 50미터를 자랑하는 볼라벤의 주먹은 견고한 철탑도 한방에 쓰러뜨린다 했다. 여름을 관전하던 관객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급기야 볼라벤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특별재난 방송은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볼라벤은 역시 강자답게 사과밭의 사과를 모조리 박살내고, 포구에서 가슴을 졸이던 어선들을 사정없이 파괴했다. 폭염, 폭우의 잔혹성을 그대로 빼닮았다.
드디어 여름은 갔다. 여름이 간 뒷자리에 서서 생각해 본다. 여름을 이토록 거칠게 만든 건 누구일까.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쾌락하고, 더 많이 소유하느라 애쓴 우리가 아니었을까.
(2012년 9월 13일자)
'오동나무 연재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아침 진심으로 겸손하고 싶다 (0) | 2013.11.24 |
---|---|
나는 이렇게 되살아 난다 (0) | 2013.11.14 |
'오빤 강남스타일'에 거는 기대 (0) | 2013.11.02 |
펜실베니아에서 날아온 전화 (0) | 2013.11.02 |
아버지의 낡은 시계 (0) | 2013.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