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
권영상
퇴근을 하느라 서울역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젊은 여자의 전화 통화가 요란을 떨었다. 30대 초반의 미혼인 듯 한 나이였지만 그의 목소리 톤은 굉장히 컸다. 얼핏 듣기에 위중한 환자를 태워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이와 다급하게 하는 통화 같았다.
“그렇게 급한 거면 말이야. 혹시 아는 의사나, 의사 아는 친구 있나 알아봐!”
전화를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몹시 다급했다.
“빽, 빽! 빽 말이야. 그러니까 인맥!”
저쪽에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지, 이쪽에서 ‘빽, 빽!’을 연발했다.
“그마저 없다면 혹시 내과의사 아버지를 둔 아들이나 딸을 안다든가, 또는 그들의 친구를 안다든가, 아니면 초중고 대학 동기들 중에, 그런 친구를 더듬어 보든가, 아니면 안면이 없더라도 의사하는 동창이나, 없으면 선배나 후배. 그런 사람 하나쯤 있어야 쉽지. 빨리 생각해봐. 하다못해 구의회 의원이나 아니면 국회의원 정도면 좋고말고 하지만 말야.”
나는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해졌다.
목소리는 높지만 그녀의 차림새로 보아 교양 없는 여자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훌륭해 보였다. 이렇게 체신이 깎일 만큼 남에게 헌신적인 도움을 주어 본 적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이름 있는 병원에 한번 가려면 예약을 해놓고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누구’ 때문에 보란 듯이 단시간에 진료받고 돌아오거나 입원하는 경우를 보아왔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긴 해도 전화 속 사람이 데려가는 환자가 원하는 병원에 얼른 입원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서울역 서쪽 역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다.
나는 그녀의 통화를 또 한번 들었다.
“병원 취직이라는 게 그렇게 쉽니?”
그 말에 나는 아! 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병원으로 급한 환자를 태워가는 게 아니었다. 통화의 상대방이 지금 병원 취업을 위해 면접쯤을 보러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허방다리를 찧은 기분으로 그만 걸음을 늦추었다. 그랬지만 궁금증은 더욱 풀리지 않았다. 통화의 그쪽 상대방은 누굴까. 의사로 취업을 하려는 걸까. 아니면 간호사일까. 내과의사를 둔 친구의 빽이 필요하고 구의원이거나 국회의원쯤의 빽이 필요한 그 사람은 지금 어느 부서에 취직을 하려는 걸까.
세상 사는 법을 이처럼 쉽고 빠르게 알려주고 있는 이 30대 여자분은 지금 어떤 직장에 다니고 있는걸까.
어떻든 간에 주변의 비호 세력이 없으면 내 힘으로 취업 하나 하기도 어려운 게 우리 사회인 모양이다. 젊은이들의 취업이 갈수록 힘든 시대다. 자녀가 취직했냐고 물으면 징역 15년감이라는 우스갯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취직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와 있다.
그들의 무거운 어깨를 ‘빽’이 또 위협적으로 짓누를까 두렵다.
(교차로신문 2012년 1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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