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분도 다 계십니다
권영상
청량리에 있는 모 기념사업회에서는 해마다 학생 백일장을 엽니다. 청량리 전철역에서 내려 버스로 서너 정거장을 가면 옛 홍릉이 나오고, 그 곁에 기념사업회가 있습니다. 나는 어떤 연유로 여러 해 백일장 심사 일을 보았습니다. 올해도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백일장은 이 사업회가 하는 일 중의 하나인데 그 사업회에 박 회장님이 계십니다. 머리칼이 눈 같이 하얀 그분은 찾아갈 적마다 허리를 낮추어 인사를 받으십니다. 한글을 공부하시는 분이라선지 말씀의 억양이 알맞고, 말씀 또한 반듯반듯하십니다.
“뭘 드실까요? 차도 있고 커피도 있는데.....”
그렇게 공손하게 여쭈어 보십니다.
그러면 나는 “아무거나 주셔도 됩니다.”고 대답합니다. 그제야 그분은 일어나 산더미처럼 쌓인 고서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검정 옛날식 전화의 수화기를 들어 저쪽에다 일러주십니다.
잠시 후, 옆방에서 찻반을 들고온 젊은 분이 대여섯 우리들 앞에 앞앞이 차와 커피 두 가지씩을 놓아주고 갑니다.
“기호를 꼭 집어 여쭈어보기가 민망해서......”
그러면서 얼른 마시라며, 일을 많이 하셔서 굵어진 손으로 차를 가리킵니다.
나는 차도 마시고, 또 조금 있다가 커피도 마십니다. 연세 많은 분에게 커피 주세요, 차 주세요! 라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는 나나 그걸 꼭 집어 물어보지 못하시는 그분 마음이나 어쩌면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일장 글제를 학생들에게 내주고 다 쓴 작품을 걷었을 때가 오후 1시였습니다.
점심시간입니다.
저녁 8시까지 심사를 하려면 점심을 대충 먹을 수는 없습니다. 예약해 놓은 음식점은 사업회 앞 길 건너 한 50미터쯤 가면 있는 음식점입니다. 근데 늘 보아왔지만 점심을 먹으러 갈 때면 회장님은 우리 일행을 다른 분에게 부탁하고 당신은 뒤로 슬쩍 빠지십니다.
그럴 때마다 다른 분과 점심약속이 있으신 모양이구나, 아니면 혼자 승용차를 타고 오시는 모양이구나, 했지요. 그러지 않고서야 따로 가실 수 없잖아요.
오늘도 그랬습니다.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더니 사라지셨습니다. 우리는 뜨거운 5월 해를 마주하며 신호를 기다려 건널목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예약한 음식점에 들어가 우리끼리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참 보기와는 영 다른 분이구나.’
그 생각을 하고 있을 그때에 그분이 음식점의 문을 열고 나타났습니다.
“여기루 오는 길에 자주 가시는 분식집이 있는데 그 앞을 일행을 모시고 지나칠 수 없다 하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안내해 주신 분이 늦게 오시는 연유를 말해주셨습니다.
그제야 그분에 대한 내 오랜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분은 사업회 정문앞 좁은 분식집에서 늘 점심을 드신다고 했습니다. 근데 여러 일행과 함께 그 분식집 앞을 지나치는 걸 주인이 보면 속상해 할까봐 먼 길로 돌아오신다는 겁니다. 나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어쩐지 옛날 시절의 황희 같은 정승을 떠올렸습니다. 그분의 인품을 황희같은 분과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요사이도 그런 분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울 지경이었습니다.
“이만저만한 일로 그냥 지나가겠다, 라는 말씀을 차마 못 드리겠습니다.”
머리칼 허연 회장님이 분식집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땡볕 골목길을 혼자 돌아온다는 것이 나를 잠시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날 저녁식사 때에도 그분은 밤 8시의 컴컴한 골목길을 혼자 빙 돌아서 오셨습니다. 남의 기호를 꼭 집어 묻기가 미안해 차와 커피를 함께 주시는 그분이 너무나 달리 보였습니다. ‘나만 편하면 그만’이거나 마치 '내 식대로가 개성'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교차로신문 2012년 5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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