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안 하는 날
권영상
아내가 출근하자, 설거지를 끝내고 숲을 보러 동네 산에 다녀왔다. 땀에 밴 몸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서며 오늘 처음 발판에 나무쪽 하나가 떨어진 걸 보았다. 본드를 찾아 곰상스럽게 나무쪽을 붙였다. 벽에 걸린 진열대가 또 눈에 들어왔다. 간단한 상비약이며, 여행을 다니며 사 모은 이런저런 소품들 밑에 먼지가 뽀얗다. 일일이 들어내고 휴지로 닦은 뒤 내 솜씨대로 정리를 했다.
그 일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으려니 여기저기서 보내준 책들이 그냥 쌓여있다. 고맙다는 편지를 할 건 하고, 책상도 말끔히 닦아본다.
오늘이 금요일, 개교기념일이다.
오늘부터 주말이 낀 3일 연휴다. 다른 때 같으면 이 황금같은 날을 그냥 두지 못한다. 배낭을 챙겨 설악으로 들어가든가 차를 몰아 치악산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지금쯤 소청봉엔 함박꽃이 청초하게 피어있을 테고, 치악산 사다리병창길엔 철쭉이 한창일 테다. 예전 같으면 나는 지금 뻥 뚫린 고속도로 위에서 악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출근이 없는 날을 온통 즐기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이번만은 다르다. 아내가 출근하고난 빈 집에 조용히 있어보고 싶었다. 아내가 지어주는 밥에 의존하던 오늘, 나는 손수 만든 야채샐러드로 점심을 먹었다. 식후엔 인터넷에서 고른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들었다. 그러고도 여유가 있어 시집 한권을 꺼내들고 아파트 마당에 나갔다. 등나무 그늘 나무 벤치에 앉아 오래도록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었다.
읽다가도 그늘 속에 들어오고 싶어 기웃거리는 5월 햇빛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바람이 좀 불면 등나무 그늘과 햇빛이 제 영역을 지키느라 밀고 밀리면서 실랑이를 한다.
한참 지켜보다 일어섰다. 아파트를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이다. 살면서 아파트를 한 바퀴 빙 돌아본 적이 없다. 아침 7시에 출근을 하고 또 퇴근을 하면 그냥 방에서 지내기 일쑤다. 시집을 옆구리에 낀 채 외과의처럼 곳곳에 눈길을 주며 걸었다. 주차해 놓은 차들 뒤엔 씀바귀꽃이 노랗게 피어 있고, 화단엔 도라지가 크고, 작약이 핀다. 놀이터에 빙 둘러 심어놓은 쥐똥나무 연둣잎에 손을 대 본다. 어린 아이 살결 같이 잔잎이 보드랍다.
아파트 정문 곁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그늘을 밟아 골목으로 나섰다. 거기 아이스크림이며 호빵을 살 때, 아버지 기제사에 참여하지 못해 원거리 참배를 하느라 소주 한 병을 사오던 가겟집. 그 집 이름이 코사마트다. 오늘 보니 그 집 지붕 위로 담쟁이넝쿨이 올라가고 있다. 그 집 옆은 세탁소다. 그 집 앞을 지나는데 남자주인이 이쪽을 내다본다.
언젠가 한번 본 분인데 얼굴을 알겠다. 나는 얼른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 집 옆엔 살구나무가 있다. 3월 살구꽃 필 때에 본 그 살구나무에 가지가 벌도록 살구가 된통 열었다.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살구나무 그늘에 나이 많은 남자가 아들뻘 되는 젊은이와 마주 앉아 프로 야구에 대해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고 있다.
‘6월 오픈’이라는 아파트 분양 광고지를 전면 부착한 승합차 두 대가 5월 볕에 지쳤는지 아카시나무 밑에서 졸고 있다. 공터엔 때늦은 명자꽃이 피고, 벚나무에선 버찌가 익고, 울타리 위로 넘실넘실 기어가는 장미는 새빨갛게 꽃을 피웠다. 저쯤 수안사 앞길엔 불을 켠 듯 색깔 고운 연등이 둥둥 허공에 걸려 있다. 그러고 보니 석가탄신일이 이 도심 가까운데까지 깊숙히 들어와 있다.
연등 아래로 유치원 아이들을 실어다 주는 노란 셔틀버스가 지나온다. 엄마 곁을 떠나간 아이들이 엄마 곁으로 다시 돌아오는 시각이다.
나도 발길을 돌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다. 출근 없는 날, 무심하게 지나치며 살아왔던 동네 풍경을 오랜만에 여유있게 만났다. 잘 산다는 것이 무언가. 골프채를 싣고 먼 데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주변풍경과 친밀히 만나보는 여유가 잘 사는게 아닐까.
(교차로신문 2012년 5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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