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하는 사랑의 향기
권영상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베란다 문을 연다. 향기나는 여인처럼 숨겨놓은 누군가가 베란다에 있다. 나는 방안 공기가 흔들리지 않게 조용히 커텐을 걷고 문을 연다. 은밀한 향기가 가득 내 몸안으로 밀려온다. 백화등의 다른 이름인 마삭줄이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밤새도록 우물물처럼 차오른 향기가 내 후각을 사로잡는다. 진한 향수를 하고 와 기다리는 성장한 여인의 향기다.
마삭줄이 우리 집에 온 지는 7,8년이 됐다.
그때도 꽃이 있었다. 어린 가지 끝에 두어 송이 피어있었는데 향기가 요염했다. 범상치 않았다. 그런 까닭에 봄 여름 가을엔 볕 잘 드는 창문밖에 내다놓고, 겨울이 오면 온전히 그를 독점하기 위해 안에 들여놓았다.
일반적으로 마삭줄은 5,6월에 꽃을 피우는데 실내에서 월동을 하기 때문인지 해마다 눈 오는 봄부터 운치있게 꽃을 피운다. 세상에 꽃 하나 없을 때 햇빛드는 공간에서 마삭줄 꽃과 유심히 만나는 일은 즐겁다. 꽃이 피었다 하면 마삭줄은 유혹이 강한 향기를 준비한다.
마삭줄이 꽃향기를 만들어 내는 시간은 추운 밤 시간대다. 본디 백화등은 그늘에서 사는 덩굴식물이다. 그러니까 낮보다는 추운 밤에 체온을 상승시키며 체온 상승과 함께 연인을 맞이하기 위해 꽃향기를 뿜는다. 꽃들도 여인처럼 좋은 냄새를 풍기기 좋아한다. 히아신스나 장미향 같은.
후각이 뛰어난 벌이나 나비라면 좋은 향기쯤은 1.5킬로 밖에서도 맡는단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지 못한다면 꽃은 꽃이 아니다. 암만 그렇다 해도 하루 종일 유혹을 위해 몸부림치듯 향기를 풍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프로답지 않다. 벌이나 나방이나 나비가 날아올 시간대를 계산해야 한다. 치커리 꽃은 대개 아침 시간대에 향기를 방출한다고 한다. 한낮에는 우리도 잘 알다시피 토끼풀꽃이, 해질 무렵엔 분꽃이, 나방이 날아올 시간대인 밤엔 달맞이꽃이 향기를 뿜는다. 향기의 농염함을 살펴 보건대 마삭줄이 꽃문을 여는 시간은 밤이 분명하다.
꽃이 문을 열자면 벌이나 나비를 유혹할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게 꿀이다. 후각을 자극하는 꿀향기. 꽃들 중에는 꿀도 없으면서 거짓으로 꿀 냄새를 풍기거나 빈약한 꿀로 자신의 육체를 섹시하게 과장하는 꽃들도 있다. 사람이나 꽃이나 상대에게 성적으로 허풍을 떠는 점에선 다를 게 없다.
근데 우리 집 마삭줄은 나비가 없는 3월부터 핀다. 그것도 나비나 벌의 발길이 전혀 닿을 수 없는 베란다 안에서 핀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독수공방 신세다. 그래서 그런 걸까.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향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할만큼 처절하다.
아무리 유혹해도 오지 않는 벌.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벌과 나비를 향해 마삭줄꽃은 눈물겹도록 진한 향기로 흐느낀다. 그럴수록 마삭줄이 더욱 안 돼 보인다.
오늘 식물백과사전을 뒤져보다 아연실색했다. 마삭줄이 꽃 하나에 두 개씩의 열매를 맺는다고 적혀 있다. 7.8년을 키웠지만 나는 한 번도 마삭줄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그 말은 곧 마삭줄이 수분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랬으니 벌이나 나비를 소리쳐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을 테고 나중에는 비명에 가깝도록 향기를 쏟아냈을 것이다. 꽃의 언어는 그윽한 향기다. 그러나 그만한 거리에서 그 목소리를 들어줄 상대가 있을 때 향기는 아름답다.
내가 과년한 마삭줄에게 큰 죄를 짓고 있다. 그렇다고 동사를 각오하고 아파트 마당에 내다 심을 수도 없다. 마삭줄은 따뜻한 남부지방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좀 비용이 들겠지만 마삭줄의 아픔을 이해한다면 남쪽 어느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 저의 고향에 데려다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 그간 마삭줄에게 바친 나의 사랑은 어찌할 것인가.
(교차로신문 2012년 4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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