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5월 숲에 내리는 빗소리

권영상 2013. 5. 28. 21:59

 

 

 

 

 

5월 숲에 내리는 빗소리

권영상

 

 

 

아침부터 창밖을 내다본다. 비가 내리는지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다닌다. 어제 일기예보로는 오늘 70밀리의 비가 내린다 했다. 남부지방엔 140여 밀리나 온다고 했고.

산을 가고 싶은데 비 때문에 망설여진다.

그 사이 나는 몇 번이나 창밖을 내다본다.

“비 온다는 소릴 듣고 뭐하러 가.”

출근을 서두르는 아내가 창밖을 기웃거리는 내게 타박을 한다.

“마당은 말랐는데.....”

나는 기어이 집을 나섰다.

“갈 거면 우산 가져가요.”

아내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뭔 배짱으로 우산을 두고 나갔다.

 

나오기 잘 했다.

비는 뜸하다. 손바닥을 펴 보아도 빗방울이 느껴질 정도가 아니다. 가는 은에비다. 이러다 말겠지, 그런 생각이 드는 아침날씨다.

나는 출근을 하듯 직장 대신 아침마다 산에 오른다. 산에 올라 정신을 깨우지 않으면 뭔가 하루의 시작이 안 되는 듯싶어 불안하다. 반복되는 출근이 삶을 안정시킨다고 믿어온 내 오래된 어리석음의 증거다.

 

 

 

산을 반쯤 오르는데 웬걸, 비가 오기 시작한다.

우산을 가져가는 저쪽 앞사람이 우산을 편다. 아내 말대로 우산을 들고 올 걸, 하는 내 마음의 후회가 인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드디어 팥배나무 언덕에 올랐다. 산 위라 그런지 굵은 비가 제법 팔뚝을 때린다. 비 그을 곳을 찾는 내 눈에 팥배나무가 보인다. 팥배나무 밑만은 비에 젖지 않고 뽀얗다. 거기 홀로 자리를 지키고 앉은 나무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다행이다. 세상 다 비가 내려도 여기만은 비가 없다.

언덕을 빙 둘러싼 나이 먹은 아카시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꽃이 한창이다. 부푼 솜사탕을 들고 선 듯 거인들처럼 나무들이 온통 순백의 꽃투성이다. 나무는 안 보이고 큼직큼직한 꽃숭어리만 잔뜩 매달려 있다. 야단스럽다. 이런 걸 꽃구름이라고 하나.

 

 

 

가만히 눈을 감는다.

좀 전까지 못 느끼던 아카시향이 코 안으로 은근히 밀려들어온다. 지난겨울, 꿀병에서 한 숟갈 꿀을 떠낼 때에 맡던 그 향기로운 아카시꿀 냄새다. 혀를 내면 혀가 달콤해질 것 같다. 이 언덕이 꿀물에 잔뜩 배어있는 듯하다.

누가 내 목덜미를 만진다. 내 등 뒤에 선 어린 아카시나무 짓이다. 그 가지에도 연둣빛 희고 큰 꽃숭어리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꽃숭어리 한쪽을 떼어 입에 넣고 씹어본다. 어린 상추 잎처럼 아삭아삭하다. 꽃을 꿀꺽 넘기고 나자, 그제야 입안에 남은 꽃 무거리에서 좀 느끼하고 달큰한 꿀맛이 돈다.

비가 언덕을 적신다. 길가에서 자라는 능쟁이 잎에 빗방울이 구른다.

오늘 꽤 많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생각난다.

벌떡 일어섰다. 비에 젖은 몸을 끌고 마을로 들어가는 일이 거북하다. 나이는 먹어가지고 아침부터 홈빡 비에 젖은 몸을 보이는 게 싫다. 팥배나무 그늘을 한 발 나서다가 나는 다시 주저앉았다.

 

 

 

그런 이유로 이 좋은 아침을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

드문드문 우산을 쓰고 가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안 보인다. 산이 밀렵의 순간처럼 조용하다. 멀리 보이는 대성사가 있는 산비탈 숲에도 무연히 사선을 그으며 비가 내린다. 바람이 불면 까불대기 좋아하던 우면산 나무들이 아침 비에 침묵한다.

신발을 벗고 나무의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세 달 전만해도 이 시간대면 출근을 하느라 나는 허겁지겁했다. 붐비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지하전철을 타고, 전철 손잡이에 매달려 책 한 줄을 읽어내려고 바둥댔다. 충무로에서 4호선으로 환승해 서울지하전철역에서 내리면 다시 지상으로 나와 마을버스를 타러 허겁지겁 인파를 뚫고 걸었다.

“이제 이런 출근 좀 고만 두고 싶다.”

그때, 나는 그런 말을 수없이 했다.

그러면서도 ‘뭘 어떻게 먹고 살건 데?’ 그런 질문을 하며 나는 나를 달래고 얼렀다. 그런데 직장을 그만 두고 보니 ‘어떻게 먹고 사는가’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끼니때마다 밥 한 그릇에 국 하나와 반찬 두 가지. 그만 두기 전이나 그 이후나 ‘먹고 사는 일’에서만은 달라진 게 전혀 없다. 아마 이 일은 죽을 때까지 그렇겠다.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는다.

팥배나무숲에 듣는 촘촘한 빗소리가 경쾌하다.

도닥도닥도닥…….

팥배나무 두 그루가 어우러져 만든 숲이라 빗소리가 웅숭깊다. 그런 까닭에 이어폰 기능처럼 양쪽에서 나를 감싸듯이 빗소리가 울려온다. 진한 아카시 꽃향기와 빗소리가 공감각적으로 내 청각과 미각 감성을 자극한다.

“과과과과과…….”

그때 저쪽 신갈나무 숲에서 청개구리가 운다.

한 차례 더 울 때를 기다리는 데 그걸로 딱 그친다. 내 귀에 자꾸 청개구리 소리의 잔영이 일어난다. 울지도 않는데 과과과과, 우는 소리가 난다. 내 귀가 좀 전의 소리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과과과과.....

비 내리는 숲이라 그런지 귀가 예민해진다. 청개구리 울음만 기억하는 게 아니다. 팥배나무에 도닥도닥 지는 빗소리도 귀는 수험생처럼 골똘하게 기억하려 한다.

 

 

 

비가 내려도 팥배나무 숲엔 비가 새지 않는다.

팥배나무가 나뭇잎 한 장 한 장을 기하학적으로 정밀하게 잘 놓았나 보다. 그래서 나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한 톨도 놓치지 않는다. 잎에 떨어진 빗방울을 가지로, 가지는 다시 나무 둥치로, 둥치는 고스란히 뿌리로 그 빗물을 흘려보낸다.

그러고 보면 나무는 기왓장처럼 나뭇잎을 차근차근 잘 놓는 훌륭한 목수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목수 중에도 대목수다. 내 고향 초당의 대목수 동집씨께서 지은 한옥도 빗방울 하나 놓치지 않게 잘 지은 나무숲을 닮았다.

뽀얗게 마른 의자에 앉아 젖어가는 세상을 본다.

어린 벚나무에 기대어 칡덩굴이 오른다. 그 칡덩굴 잎이 아침 비에 투덕투덕 운다. 어린 벚나무가 만들어 떨어뜨리는 물방울 때문이다. 굵은 물방울에 불만이 많은 아이처럼 투덕투덕 한다.

 

 

 

 

끝내 일어서고 말았다.

언제까지나 비를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걸어 내려가는 길 모롱이에 찔레꽃이 하얗다. 나는 비를 맞으며 그 찔레꽃 앞에 가 한참을 서 주었다.

찔레꽃을 보려니 내가 아는 슬픈 이들이 떠오른다. 내 입으로 발설하기 어려운, 민족전쟁 시절 북으로 올라간 친지가 있다. 젊은 나이에 감염된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분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쪽에선 한 여인이 홀로 70년을 살다가 세상을 뜬 아픔이 있다. 민족을 너무도 사랑하느라 그만 가정을 버리고 초록의 산하에 목숨을 묻은 사람.

그들의 행적은 언제쯤이면 교과서 속의 공평한 역사를 말하듯 말해질 수 있을까.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은 그 무렵의 서사적 이야기들은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원죄처럼 내 몸에 머물러있다. 마음에 품은 것을 다 말하지 못한 채 저쪽 세상으로 간 사람들의 아픔을 저 찔레꽃에서 본다.

하얀 찔레꽃이 하염없이 비를 맞고 있다.

찔레꽃은 그때, 보리밭에서 울려나던 총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탕, 탕, 탕!

 

 

 

구불구불한 소나무 숲길로 타고 내려온다.

산속 오솔길이 좋은 건 휘어지고 구부러졌다는 점이다. 찔레덩굴을 깜물 돌아들면 산은 호젓히 가는 나를 숨긴다. 고라니처럼 내 몸을 은닉하여 가다 보면 저쯤에서 또 누가 온다. 그 누구와 나는 서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며 구불구불한 산길을 간다. 좀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으면 갑자기 다가오는 길과 길위에 선 사람 때문에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우면산은 숲이 울창하다. 특히 소나무숲길은 더욱 그렇다.

 

넓은잎나무 숲에서 바늘잎나무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귀가 의혹을 느낀다. 소나무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들리는 빗소리가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둔탁하던 빗소리가 썰어놓은 빗줄기처럼 빗소리마저 가늘고 짧다.

내가 소나무 둥치 앞에서 소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다.

소나무 둥치에서 솔 딱지를 타고내린 물방울 하나가 데구르르 구르는 게 보인다. 그 물방울이 뚝 아래로 떨어진다. 그 아래 납작 엎드린 수풀담쟁이 잎에 가 떨어진다. 담쟁이가 얼른 물방울을 잎자루로 흘려보낸다.

숲은 이렇게 공생한다.

어찌 보면 큰 나무가 햇빛이며 빗물을 독차지하는 것 같아도 가만히 보면 큰 나무는 제가 쓸만큼만 받고 남은 것은 그 아래에서 크는 생강나무에게 내려준다. 생강나무도 제가 쓸만큼만 받고 남은 것은 또 그 아래 수풀담쟁이에게 주어 골고루 같이 목숨을 지키며 산다.

잠깐 멈추어 선 이 순간, 빗방울 하나를 서로 나누며 사는 숲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삐익삐익삐이.......”

직박구리가 운다.

“칫칫칫칫........”

어디선가 청설모가 또 운다.

귀의 촉수가 컴컴한 바늘나무잎 숲 안을 더듬는다.

시골에서 자라 그런지 소리에 대한 기억이 많다. 솔숲에 이는 푸른 솔바람 소리, 문틈에서 고적하게 우는 문풍지 소리, 봉당에서 잠자던 강아지가 딸꾹 잠꼬대하는 소리, 갑자기 이가 맞느라 덜컹 하는 마룻장 소리, 마루 위를 구르는 한 밤 가랑잎 소리, 바람에 동실거리는 오동나무 마른 열매 소리, 호수에서 밤새워 우는 철새울음, 처마 끝에서 온종일 뚝뚝 떨어지는 늦여름 낙숫물 소리, 깊은 밤 신작로를 내달려가는 자동차 소리, 그럴 때에 요강에 떨어지던 어린 조카의 오줌소리 또로로로.......

소리는 뇌의 감성을 자극한다.

대지를 휩쓰는 거대한 바람소리나 눈 내리는 밤 쩡쩡 꺾여나는 설해목 소리, 산을 뒤흔드는 웅장한 폭포소리, 어촌의 아침을 평화롭게 찰싹이는 연옥색 파도소리, 컴컴한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

이런 자연의 소리는 사람을 영적으로 감동시킨다.

 

 

 

내 고향은 인근 어촌 마을과 불과 500여 미터 거리다.

밤이면 늘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들었고, 화사한 아침 파도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

가을밤엔 가끔 아버지와 함께 마루에 앉아 들판을 건너오는 크고 웅장한 파도소리를 들었다. 배우지 못한 아버지는 그런 장엄한 해조음을 들으면서도 내게 말 한 마디 못하셨다. 그래서 그 엄숙한 어둠의 시간은 모조리 나의 것이었다.

소리는 듣는 자의 것이다. 그때는 듣고 말았던 소리도 언젠가 문득 기억의 깊은 심연에서 울려나올 때가 있다. 그때 가슴 뭉클해지던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다 있다.

 

 

 

나는 젖지 않고 빗속을 걸어와 집에 도달했다.

나무들이 몸을 옴츠리거나 터널을 만들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를 막아주었다. 신갈나무 밑을 지날 때는 신갈나무들이, 산벚나무 밑을 지날 때는 그 산벚나무들이,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밑을 지날 때는 또 그들이 터널을 만들어 주었다.

남부순환로의 건널목을 건널 때를 제외하고,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끼리, 아카시는 아카시나무끼리 어깨를 결어 내가 맞을 비를 대신 다 맞아주었다.

빗방울이 잔뜩 실린 아파트 마당 살구나무 앞에 서서 두 손으로 쿵, 나무를 흔든다.

후두두두......

살구나무 잎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내 몸으로 뛰어내린다.

아주 오랫 적 내 안에 들어와 살던 소년이 내게 짓궂음을 피운다. 그 빗방울을 나는 남김없이 흔쾌히 다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