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Three job을 살다가신 뒷집 아저씨

권영상 2013. 5. 29. 18:23

Three job을 살다가신 뒷집 아저씨

권영상

 

 

 

 

 

“아저씨, 머리 좀 깎아주세요.”

머리가 길면 어린 시절 나는 뒷집에 갔다. 흙 담장을 하나 사이에 둔 뒷집. 뒷집은 이발소가 아니었지만 나는 뒷집에 갔다.

“그래. 어서 오너라.”

막 괭이를 들고 일을 나가시던 뒷집 아저씨가 나를 맞아주신다.

그리고는 암말없이 그늘이 있는 사랑밖 마당에 의자를 내놓으신다. 등받이가 있는, 대나무로 엮어 손수 만든 앉을개가 둥그런 의자다.

우리가 살던 그 무렵, 1960년대의 시골에서 자란 나는 그런 멋진 의자를 보지 못했다. 온돌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 문화만 있었지, 의자에 앉는 문화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앉으려문.”

아저씨는 이쪽에 서 있는 내게 의자를 가리켰다.

“예. 아저씨.”

나는 그 예쁜 의자에 가 가만히 앉는다.

 

 

말이 아저씨지 뒷집 아저씨는 아저씨가 아니다. 형님뻘인 분이다. 아버지 말씀으로 열 촌이 넘는, 항렬로 보아 형님뻘이라 하셨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내가, 자식이 많은 쉰 연세의 어른을 형님이라 부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쉬운 대로 ‘뒷집 아저씨’라 불렀다.

그 뒷집 아저씨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이발 기술을 배웠는지는 모른다.

내가 대나무 의자에 앉으면 아저씨는 하얀 앞가리개 천을 내 앞에 두르고는 이발기계를 드셨다. 그러고는 내 등 뒤에 서셔서 내 뒷통수를 앞쪽으로 지긋이 눌렀다. 머리를 깎겠다는 신호였다.

나는 보지 않아도 아저씨가 내 머리를 어떻게 깎으시는지 다 안다.

아저씨가 드신 이발기계는 나무로 깎은 긴 손잡이가 두 개 달렸다. 왼손으론 기계가 움직이지 않도록 왼쪽 손잡이를 잡으셨고, 오른손은 둘째와 셋째 손가락 사이에 오른쪽 기계 손잡이를 끼우고 가볍게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머리를 밀면 머리칼이 깎여났다.

 

 

 

 

나는 아저씨가 머리를 깎기 쉽게 머리를 숙여드린다.

그러면 아저씨는 잘각잘각잘각 기계소리를 내며 머리를 밀어올리셨다. 애시당초 무슨 머리 깎을 거냐고 물어보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때로 무슨 머리 깎을 거냐고 물으면 나는 “그냥머리요.”했다.

“그냥머리라.”

아저씨는 그 말뜻을 잘 아신다.

왜냐하면 아저씨가 하실 줄 아는 머리는 빡빡머리 뿐이었다. 아이들은 그 빡빡머리를 보통 ‘그냥머리’라고 했다. 아이들이 좀 커 머리가 굵어지면 이부가리(2푼머리라는 일본식 말)를 했고, 어른들은 하이칼라 머리였다. 그러니 머리 형태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사람을 세등분으로 보는 그분의 눈에 달렸다.

 

 

머리를 다 밀고 나면 아저씨는 물세숫대야 곁에 둔 비누곽 비누에 붓질을 하여 북적북적 거품을 일으켰다. 그 하얀 거품붓을 들어 머리 뒤며 귀밑머리 밑을 슥슥 바르셨다.

그러고는 등받이 의자에 묶어둔 낡은 가죽허리띠에다 면도날을 세우셨다. 슥슥슥슥, 날을 뉘여 아래로 두 번 밀어내리고 위로 두 번 밀어올리셨다. 그렇게 서너 번 슥슥슥 슥슥슥 세운 날로 면도를 하셨다. 면도날에 싸각싸각 깎인 거품묻은 면도밥은 내 어깨에 얹은 신문지 조각에 닦으셨다.

“자, 이제 다 됐다!”

이발을 끝내고 하얀 앞가리개 천을 훌훌 터시면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뒷집을 나왔다.

 

 

 

어렸을 땐 뒷집 아저씨가 공으로 깎아주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냥머리’를 하던 내가 ‘이부가리’를 하고, 두 손으로 깎던 이발기계가 한손으로 깎는 ‘바리깡’으로 변해갈 즈음 이발료가 어떻게 전해지는지를 알았다. 보리가 나는 철이면 보리쌀을 드렸고, 가을이면 쌀을 드렸다.

뒷집 아저씨한테 머리를 맡기는 아이들은 나만이 아니었다. 어른들도 이 사랑밖 마당에서 깎는 이발이 좋아 뒷집 아저씨를 찾았다.

그러다 윗마을 허가받은 이발소가 ‘찌르면’ 읍내 파출소에 잡혀가 구류를 살거나, 때로 이발기계를 다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또 언제 보면 뒷집 사랑밖 마당에서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있었다.

 

 

 

뒷집 아저씨는 우리 동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농사를 업으로 하시는 분이다. 당연하다. 우리 사는 곳이 농촌이니까. 그런데도 어느 여름철에 보면 뒷집 마당 가득히 매어놓은 줄에 촘촘히 오징어를 말리고 계셨다.

아저씨는 오징어가 잡히는 여름이면 오징어배를 타셨다. 철둑길 하나를 넘으면 어촌이 있었다. 겨울이면 또 명태잡이배를 얻어 타고 바다로 나가셨다.

1960년대, 그 무렵 어선은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가는 목선이 대부분이었다. 장비가 워낙 원시적이서 조금만 큰 파도에도 어선은 침몰했고 배에 탔던 뱃군들은 목숨을 잃었다. 폭풍이 가고 난 뒷날이면 상여를 메고 울며가는 풍경을 매양 보았다. 그 시절, 고기잡이 배를 탄다는 것은 십중팔구 죽음을 자처하는 일이기도 했다.

 

 

 

근데 그 일에 뒷집 아저씨가 뛰어들었다.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고깃배를 탈 수 있었는지 그건 모르겠다. 그러나 넉넉하지 못한 뒷집 아저씨에게도 우리 아버지처럼 6명의 한창 크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아니, 뱃사람 일을 왜 자청한대!”

당시 농가의 사람들은 뒷집 아저씨의 이런 행각을 의아해 했다.

걸핏 하면 바다에 빠져 시신도 못 건지는 뱃사람들의 삶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리를 듣는데도 뒷집아저씨는 배를 탔고, 삯으로 받아온 오징어나 북어를 팔아 돈을 만들었다.

 

 

 

 

보다시피 뒷집 아저씨는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농사가 주업이고, 틈틈히 이발을 하고, 또 풍어기를 이용해 고깃배도 타셨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쓰리잡’인 셈이다.

그 무렵, 나는 어렸어도 그분의 그런 다양한 직업활동이 부러웠다. 그런 여러 개의 일을 가지셔서 그런지 그분은 당시의 시골사람답지 않게 모던한 풍모를 즐겼다.

 

이발을 하실 때면 늘 멋스럽게 두툼한 파이프 담배를 피셨다. 다들 대나무로 만든 전통 담뱃대를 쓰셨는데 그분만은 상선의 선장들이 애용하는 파이프 담배를 즐기셨다. 외출을 할 때도 두루마기 대신 싸구려이긴 해도 서양식 외투를 입으셨고, 언제나 넓고 두툼한 고동색의 가죽허리띠를 매셨다. 그뿐이 아니다. 어디서 구하셨는지 검정 썬그라스도 가끔 쓰시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의 ‘쓰리잡’이 그분의 외모를 풍요하게 만드신 것 같다. 어디로 보아도 우리 집 살림이 뒷집보다는 넉넉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전통적 유교풍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다. 그건 어쩌면 뒷집 아저씨와 달리 아버지 손에 쥐어지는 현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뒷집 아저씨에겐 본업 같은 부업이 하나 더 있다.

소목장 일이다.

여름철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에 머리를 깎으러 가면 대나무 의자 대신 둥그런 나이테 의자가 나온다. 가중나무의 나이테와 빨간 목질이 그대로 살아있는 의자다. 거기에 앉으면 나무의 감촉 때문에 엉덩이가 따스하다. 나무의 둥근 단면을 잘 살린 의자였다. 그 의자를 뒷집 아저씨가 손수 만드셨다.

그 정도였다.

뒷집 아저씨에겐 종가의 조카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대목수다. 대목수인 그분의 조카는 집을 지으면 소목일을 뒷집 아저씨에게 맡겼다. 뒷집 아저씨는 주로 창문이나 문살문을 만들고, 반닫이장을 만드셨다.

“쇠만 아니면 뭐든 할 수 있네.”

그분의 나무를 다루는 솜씨는 그분의 말씀대로 탁월했다.

양수기의 볼트를 잃어버리면 나무로 볼트를 깎아 끼워 물을 퍼올렸고, 냄비 손잡이가 없으면 나무로 감쪽같이 손잡이를 만들어 내셨다. 그분은 소목수로서도 남부럽지 않은 능력을 발휘하셨다.

 

 

 

나는 지금도 뒷집 아저씨의 그런 삶을 아름답게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그분이 즐겨 하시던 두터운 가죽허리띠를 30여년 가까이 매고 있을 정도이다.

21세기를 살아내려면 ‘투잡’ 이나 ‘쓰리잡’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철밥통' 고용 형태가 점점 줄어들고, 노동시장이 자유로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거지만 백여 년이나 되는 일생을 한 가지 일만으로 살아낸다는 건 어렵다. 그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한 때 ‘한 가지만 잘하면 성공한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어떻게 들으면 그 말도 일리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직업으로는 그가 성공할 수 있겠으나 인생이라는 넓은 틀로 볼 때 그런 사람의 삶은 행복할 수 없다.

다들 살아봐서 아는 일이지만 인생에서 성공이란 말은 없다.

인생은 그저 평범한 거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밥을 먹는 일이다. 그게 인생이다. 그렇게 살아내는 것만도 어찌보면 성공일지 모른다. 그런 인생을 지키는 데엔 뒷집 아저씨 같은 두어 개의 일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파이프 담배를 피며 머리를 깎아주시던 뒷집 아저씨의 여유로움을 떠올려 본다.

아저씨 떠나신지 20년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