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공경하는 가족 공동체 문화
권영상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나는 얼른 방을 나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권서방, 날세. 다행히 집에 있었구만.”
넷째 손위동서다.
저녁에 다 같이 밥을 먹고 싶으시단다.
나는 그러자고 대답한 뒤 시계를 봤다. 벌써 6시다. 아내와 딸아이가 퇴근하려면 40분 남았다. 다들 집에 오는 대로 갈 수 있게, 하던 일을 마치고 집안 정리부터 했다.
정리 중에 딸아이는 회사일이 바빠 늦겠다는 전화가 왔고, 아내는 알맞은 시간에 들어왔다. 나는 아내를 되돌려 세워 집을 나섰다.
집앞 큰길 건너 5분이면 닿는 거리에 넷째 동서집이 있다.
“아니, 뭔 일이래?”
아내가 궁금한지 자꾸 내게 묻는다.
“그냥 술 한 잔 하시려고 그러겠지뭐.”
그러는데도 아내는 ‘언니 생일인가?’ 아니면 ‘형부 생신?’ 그러며 날짜를 자꾸 짚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안 식구들이 다 모여있다.
“형님, 혹시 처형님 생신 아니신가요?”
나는 편한 대로 처형님을 핑계로 사태를 떠보았다.
“생신은 무슨 생신!”
형님이 아무 일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거실엔 이미 큼직한 교자상에 저녁밥이 차려져 있었다.
손위 동서와 처형님, 그분들의 큰아들 내외와 손자, 그리고 여기서 먼 목동에 사는 둘째아들 내외. 그리고 우리 내외. 9명이 교자상 앞에 빙 둘러앉았다. 이제 초등학생인 3학년 손자에서부터 삼십 대인 아들내외와 오십대와 육십대인 우리와 올해 일흔을 넘기신 넷째동서내외. 그렇게 앉고보니 뭔가 기운이 팽창하는 것같고 방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결국 말하게 되네만 오늘이 우리 둘째 며느리 생일이네. 권서방까지 이렇게 시간을 내주어 고마워.”
밥을 먹고, 술 몇 잔을 하고나자 비로소 형님이 그 말씀을 하셨다.
아내가 헛짚기는 했어도 생일은 분명 생일이었다.
“둘째 며느리, 생일 축하해요. 이렇게 온가족의 축하를 받으니 흐뭇하겠어!”
그 말에 나는 얼른 둘째며느리의 생일을 축하 해주었다.
남의 집 며느리인데도 내가 좀 말을 낮출 수 있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그간 낯이 많이 익었기 때문이다. 비록 길 하나를 사이로 나뉘어 살긴 해도 신정이면 신정, 가족들의 생일이면 생일, 초등학교 입학식이면 입학식, 퇴직이면 퇴직을 이유로 나도 넷째동서네 집안 일에 자주 참여했다.
음식상을 대충 치우고 큰며느리가 손아랫동서를 위해 준비한 생일 케익을 가지고 나왔다.
케익에 촛불을 켜고 우리 아홉 명은 소리 높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진심으로, 아니 아내도 그랬겠다. 진심으로 착하고 이쁜 둘째며느리의 건강을 기원했고, 예쁜 아기 하나 낳기를 바라며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물론 내 곁에 앉은 형님도 그랬고, 형님의 아들들도 손자도.
노래가 끝나자, 형님이 둘째며느리에게 샴페인 한잔을 권했다. 나도 조카들에게 술 한잔씩을 권하며 생일 케익을 떼었다.
오늘 행사의 당사자인 둘째 며느리가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시간을 내주신 이모부님과 이모님. 또 아주버님과 형님과 조카와 제 남편. 제 생일을 이토록 진심으로 축하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인사를 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무엇보다 마음씨가 곱다.
“동서, 건강해.”
큰며느리가 앉은 채 자신의 손아랫동서와 삼페인 건배를 했다.
“그래. 다시 한번 둘째 며늘아이 생일을 축하한다. 힘든 일 있더라도 참고, 밥 잘 먹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형님이 축하 인사의 마무리를 잘 지어주셨다.
우리는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말하고, 웃고, 손뼉치고, 어린 손자의 우스개 소리도 듣고, 강남스타일 춤구경도 하고......
음식이 떨어지면 두 며느리와 아들들이 날랐다. 큰조카는 음식 만드는 솜씨가 좋아, 광어회며 광어탕은 그의 손에서 나올 정도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집을 나서자, 굳이 둘째조카가 우리 앞에 제 승용차를 대었다. 코 앞이 집인데 목동까지 갈 조카가 우리를 태워주고는 먼 저의 집으로 갔다.
“그 형부 같은 사람 없어.”
아내가 계단을 걸어오르며 한 마디 했다.
“그냥 즈이끼리 생일 해 먹으라 하면 될 걸. 꼭 불러다가 멕이고 그래.”
잘 한다는 말인지 잘 못한다는 말인지.
“내 보기엔 그런 분위기에 순순히 따르는 며느리들이 더 훌륭해 보이던데.”
나는 현관문을 닫으며 집에 들어섰다.
어떻든 그 모습이 요즘 보기 드문 그 형님댁의 풍습이다.
다들 자식들 눈치 보느라 찍, 소리 못하고 사는게 요즘 부모들이다.
그러면서 그게 마치 자식들을 생각하는 대단한 배려인 양 착각하며 사는 이들 또한 많다. 나도 대표적인 그들 중 한 사람이다. 예전 아버지한테서 보고 배운 가정문화를 잘 지킬 생각보다는 그저 시류를 쫓으면서 ‘애들도 편하고 부모도 편하고. 좋은 게 좋지뭐,’ 그런 식이다.
그러는 내가 무책임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그 형님댁은 우리 집과 다르다.
늘상 모임에 불러주어서 가 보아 알지만 늘 일곱 식구의 중간에 잘 차린 밥상이 있다. 밥상을 가운데 두고 가족이 모여 생일잔치를 하고, 명절잔치를 하고, 퇴직 축하잔치를 한다. 그러니까 그 형님네는 밥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공동체다.
내가 다음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랄지 모르겠다.
그 형님네 두 아들 내외는 매주 토요일 아침은 아버지 집에 와 먹는다. 그 형님도 공직에 계시다 퇴직하였지만 하시는 일이 있고, 처형님도 직장이 있어 토요일도 출근을 하신다. 그러느라 비어있는 집이어도 두 아들들은 별일이 없으면 본가에 와 어머니가 해놓은 밥을 챙겨먹고 저들이 자란 그 집에서 토요일을 보낸다.
예전 우리가 살던 농가의 풍습에도 이런 밥 문화가 있었다.
친척 중에 누가 군에 가거나 먼 곳으로 취직이 되어가면 불러다 밥을 같이 먹었다. 큰 볼일을 보러 갈 때도 좋은 밥을 지어 함께 먹었고, 큰일을 마치고 돌아와도 함께 밥을 먹으며 격려하며 위로를 했다. 그러니까 친족과의 관계망을 다지는 중심에 밥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와 다르다.
그 ‘밥’이 들어설 자리에 ‘봉투’가 비집고 들어서 있다. 친척 중에 누가 대학에 합격했다거나 군에 입대한다 해도 불러 얼굴을 익히며 같이 밥을 먹는 풍습이 없어졌다. 어른들 간의 얼굴을 보아 그저 축하의 돈봉투를 보내고 만다. 밥과 비교한다면 밥값의 몇 배가 든다. 그런데도 돈, 그 이상의 아무 것도 교류되지 않는다. 일종의 ‘거래’만 있다. 받았으니 주고, 주었으니 받는 행위만 남을 뿐 공동체 의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제겐 이모부가 우리 식구 같이 느껴져요. 나래도 제 동생 같구요.”
언젠가 밥 먹는 자리에서 둘째조카가 그 말을 했다.
“그래. 고맙다.”
나는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대체 그의 어떤 마음에서 나왔을까, 그게 궁금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밥이었다. 여러 차례 같은 밥상 앞에서 같이 밥을 먹는 중에 ‘식구’라는 의식이 무심중에 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게는 여러 명의 다른 동서들도 있고, 그들의 자녀들도 있지만 그들에게서는 그런 공동체의식을 느낄 수 없다.
“나래 아빠!”
그들 손위 동서들은 나를 부를 때 그저 편하게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넷째 동서만은 나를 '권서방'이라고 호칭한다. 권서방이라는 말에는 옛 농경문화적 냄새가 묻어있고, 또 당신과 나는 남이 아니라 동서지간이라는 관계망도 들어있다. 그러니 ‘권서방’이라는 말에는 정주문화가 깊이 배어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정주문화란 뭔가? 밥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다.
가정이 해체되고 붕괴되는 중심에 온 가족이 함께 먹는 밥 문화가 없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대체로 가정문화는 밥을 통해 이어진다. 우리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먹는 밥엔 밥 이상의 소중한 가족문화가 응축되어 있다. 상차림은 오랫동안 여성이 담당해 왔기 때문에 여권이 서고 있는 지금 시대에 밥을 이야기하는 건 시대착오적일 듯도 하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젊은 부부들 중에는 남자가 밥을 하고 아내를 먼저 출근시킨 뒤에 직장에 나가는 이들도 많다. 누가 밥을 하든 밥은 가정의 중심에서 가족관계를 다지는 일을 함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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