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촛불과 단둘이 마주 앉아보는 밤

권영상 2013. 5. 22. 17:24

촛불과 단둘이 마주 앉아보는 밤

권영상

 

 

 

 

 

아내가 냉장고에 반찬을 만들어 넣고 강릉으로 갔다. 해마다 만나온 대학 친구들 모임이 토요일인 오늘밤에 있다. 나는 바깥일을 끝내고 돌아와 저녁을 차렸다. 볼일을 보러 나간 딸아이가 7시쯤 돌아온다고 한다. 그 시각에 맞추어 거실과 현관의 불을 환하게 켰다. 오늘 하루이긴 해도 엄마 없는 집을 컴컴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기다려도 딸아이한테서 아무런 소식이 없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저녁을 들었다. 수저를 놓을 때쯤 12시 경에야 들어오겠다는 전화가 다시 왔다.

방 정리를 좀 하고, 밀린 일을 하던 중에 휴대폰이 또 운다.

“밥은 먹었어?”

아내다.

밥 걱정을 하는 건 아내의 떨치지 못하는 버릇이다.

나는 아내가 만들어 놓고 간 반찬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걸 내가 먹었다는 뜻이다. 내가 열거하는 반찬 이름을 듣고, 아내는 안심했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10시쯤 하던 일을 놓고 방을 나왔다.

삶아놓은 감자를 꺼냈다.

감자 하나를 집으려다 보니 환하게 켜놓은 불이 싫다. 거실 불을 껐다. 방이 갑자기 불빛 모드에서 어둠 쪽으로 쿵 내려앉는다. 불빛 때문에 붕 떠있던 내 정신이 안락하게 내려앉는다. 내 몸의 균형이 천천히 조절된다.

그때에 괜히 또 엉뚱한 생각이 든다.

가스레인지 뒤 창틀에 놓인 사과향 초를 식탁 위에 가져와 불을 켰다. 그러고는 집안에 있는 모든 전등불을 껐다. 감시자처럼 달라붙는 전등불빛이 동시에 우리 집에서 모두 달아난다.

오직 낮고 고요한 빛만이 촛불 주위에 자분자분 모인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불빛과 마주 앉는다.

내가 낯설어 그런지 사과향 촛불이 연실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낯설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빤히 촛불을 바라본다. 너무도 오랫동안 나는 촛불을 잊고 살았다. 단지 밝다는 이유만으로 정신을 후둘러 빼는 전등불에 짓눌려 살았다.

촛불 앞에 앉아본지 40여년도 더 되는 것 같다.

감자 한 입을 먹다말고 그 옛날의 촛불을 마주 본다.

촛불과 나.

갑자기 우리는 둘이 되었다.

이 밤, 살아서 서로 호흡하는 건 촛불과 나, 둘이다. 촛불은 나를 의지하고, 나는 희미하나마 촛불에 의지한다. 촛불은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 들을까봐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나를 본다. 내가 말을 걸듯이 호오, 입김을 분다. 대답이라도 하듯 촛불이 너울거린다. 입술을 다물고 천천히 날숨을 내쉰다. 촛불이 넘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렇게 서로 이야기가 된다.

 

 

 

 

촛불을 가만히 혼자 둔다.

불빛이 식탁 주위로 동그랗게 내려앉는다.

요만한 둘레의 뽀오얀 기억처럼 촛불빛이 소복히 날아내린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등잔불 곁에서 아버지 두루마기를 만드셨고, 그 앞에서 누나와 나는 구멍난 양말을 제각각 꿰매었다. 그때는 양말도 한 켤레뿐이라 구멍도 자주 났다. 우리는 그렇게 바지든 양말이든 구멍이 난 자리를 우리 힘으로 밤이면 촛불 앞에서 꿰매었다.

그렇게 자급자족하듯 살아 그런지 지금도 가슴에 뻥하니 외로움의 상처가 나면 내 손으로 어떻게든 처방하려 한다. 의학의 힘으로 해결할 일도 양말을 꿰매듯 내 손으로 다스리려 한다. 아니, 그게 게으르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식탁에서 일어나 어두운 거실로 간다.

전기가 없는 컴컴한 세상 속으로 내가 걸어 들어간다. 전기가 없다면 우선 즐겨보던 토요일 오후 9시 45분의 사극을 볼 수 없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사극 방영이 안 된다 해도 밤 시간을 보낼 게 있다. 유선채널 ‘다시보기’ 속의 오래된 영화들이다. 화양연화도 좋고, 와호장룡도 좋고 중경삼림도 좋다. 근데 그것도 전기가 없어 못 본다면 짜증난다. 전기가 없다면 당장 인터넷으로 날아오는 이메일을 체크할 수 없어 답답하겠다. 아니 외로워 마구 소리칠지 모르겠다. 전기가 없다면 나는 세상과 돈절된 섬에 홀로 갇힌 미아다.

그 옛날, 촛불 앞에서 뚫어진 양말을 꿰매고, 빌려온 책을 읽으며 혼자 그 긴 겨울밤을 나는 잘도 넘겼다. 그런데 나는 지금 전기가 없는 세상을 견디지 못하게 됐다. 어느 덧 전기의 노예가 되었다.

 

 

 

소파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

저쯤 벽모퉁이 뒤 식탁 위에 있는 촛불빛이 이쪽으로 어룽어룽 날아온다. 반닫이 옷장, 피아노, 벽시계, 열린 문, 액자와 책더미..... 그들은 정원의 바위처럼 제 그림자와 함께 나보다 먼저 침묵에 들어가 있다. 산이나 개울에서 굴려온 오래된 바위와 같다. 전기라는 에너지를 그들에게 주입하지 않는대도 그들은 늘 그 자리에 있어왔듯 아무 불평이 없다. 그들은 전기 없이도 사람과 동거하는 일에 익숙해 있다.

 

 

 

5월 봄밤이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베란다 행복나무 밑에 둔 의자에 옮겨가 앉는다.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려니 숲에 온 듯 편안하다. 이제야 베란다에 사는 향수나무 꽃향기가 나를 휩싸고 있음을 안다. 안성에서 사온 대파가 알싸한 파향을 뿜고, 감자 심은 화분에서 풍기는 구릿한 흙내를 맡는다. 전등불빛의 부재를 통해 저들은 제 향기를 드러낸다.

그렇듯이 이 밤, 아내의 부재를 통해 나는 그간 잃어버렸던 촛불의 기억을 찾아간다.

 

 

 

요만만한 촛불만으로도 사람이 살기에는 밝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가 쏟아내는 정보 덕분에 우리가 잘 사는 것 같지만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내면을 좀 살펴보려 하면 언제나 방해공작을 편다. 살아보아 알지만 크고 요란한 것들은 언제나 나를 꿰뚫어보는 일을 방해한다.

나를 보는 데는 촉수가 높은 큰빛이 필요하지 않다. 요만한 촛불빛 정도면 충분하다. 현자들이 대개 새벽 아련한 미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였듯이.

 

 

 

의자에서 내려와 타일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본다. 엉덩이가 차지 않다. 이 늦은 봄을 이끌고 가는 우주의 기온이 따뜻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때 등 뒤에 쌓아둔 빈 화분더미에서 딸깍! 소리가 난다. 누가 건들지도 않았는데 이 시각 흐트러졌던 제 몸의 균형을 잡는다. 창밖에서 밤새 한 마리가 휙 날아간다. 보이지 않는 우주의 기운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세상 만물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시 식탁 앞에 앉아 촛불을 본다.

촛불은 저 혼자 조용히 사색하기를 좋아한다. 외로워하기를 좋아하고, 시간 여행하기를 즐긴다. 길 잃은 여행자에게 밤새도록 빛을 날려보내는 일을 좋아하고, 어둠을 고요하게 지켜보는 걸 좋아한다.

아내가 없는 오늘 밤, 전깃불빛에서 보지 못한 경이로움을 요 작고 또릿한 촛불 앞에서 경험한다. 촛불은 전깃불과 달리 살아 호흡하는 불이다. 낡은 불을 끝없이 밀어내고 새 불을 만들어 빛을 키운다.

그래서 촛불을 보면 폭풍처럼 가슴이 요동친다.

 

 

 

단 하루라도 혼자 조용히 길을 가는 밤을 얻는다면 나는 촛불과 동무삼아 가겠다. 촛불은 충실한 대화자다. 굳이 입을 열지 않고도 충분히 대화가 되는 동무다.

아무리 바빠도 때로는 사람이 아닌 것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갖는 시간이 필요하다. 바위도 좋고, 나무도 좋고, 구름도 좋고, 풀꽃도 좋고, 연필도 좋지만 나는 촛불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겠다. 그에겐 나른하거나 덤덤한 마음을 깨워 흔들어주는 뜨거운 격정이 있다.

나는 나이를 먹어도 촛불처럼 설렐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좀 실수를 하더라도 촛불처럼 흥분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촛불에겐 불의의 역사를 뒤집는 청년다운, 혁명가의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