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눈물이 사라진 사회
권영상
빈 속으로 우면산에 올랐다.
다들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을 하는데, 혼자 밥을 먹기 미안해 오늘은 그냥 집을 나섰다. 몇번인가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더니 그 사이 산이 신선한 초록으로 뒤덮였다. 마치 편안한 안식의 공간에 임하는 기분이다. 샘물터를 지나 200여 미터를 오르면 두 갈래 길에 찔레덩굴이 있다. 내 발길이 거기에 가 멈추었다.
꽃이 언제 피려나 그러며 그 곁을 지났는데, 오늘 보니 두어 송이 하얗게 핀다. 서울 기온이 확실히 높다. 여기 조팝꽃 필 때 서울보다 위도가 낮은 안성에 조팝꽃 안부 전화를 하면 아직 꽃 필 때 멀었다 한다. 청초히 핀 찔레꽃에 코를 댄다. 향기가 은은하다. 식물이 다 그렇듯 한번 꽃 피기 어렵지 한두 송이 피기 시작하면 금세 앞다투어 피는 게 꽃이다. 모레나 글피쯤이면 그 하얀 순백의 꽃무리를 보겠다.
한 걸음 물러서고 보니 쏙쏙 오르는 연한 찔레순이 있다. 나도 모르게 살 오른 찔레순 쪽으로 손이 간다. 어린 시절 찔레순을 꺾어 먹던 그 손이다. 그 손이 통통하게 살이 찐 찔레순을 꺾었다. 잎을 따서는 앞니로 자른다. 오삭, 한다. 오삭오삭오삭. 연한 순을 앞니로 잘라 입안에 밀어넣는다. 가시까지 통째 들어가지만 찔레가시조차 연하다.
꼬작꼬작꼬작 몇 번 씹는다. 입안에 찔레물이 돈다. 삽상하다. 아린듯, 쌉쌀한 듯, 무미한 풀냄새가 난다. 꼴깍 넘긴다. 목 너머가 환히 열리면서 내 몸이 파래지는 느낌이다.
찔레순을 따 먹으며 굶주린 배를 달래던 때가 우리에게 있었다.
찔레꽃, 하얀 찔레꽃.
밭두렁에 찔레꽃 피면 세상이 딱 멈춘 듯 고적해진다. 홀로 피는 찔레꽃 때문에 들판은 무섭도록 적요하다. 흰색이 뿜어내는 고독과 외로움의 이미지 때문이다. 갑자기 이 세상에 나 혼자가 된 기분. 실제로 봄 들판에 감자씨를 넣고 파씨를 넣느라 바쁘던 사람들도 이 때쯤이 되면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사람 없는 빈 들판에 짙푸르게 자라는 보리와 눈물겹도록 흰 찔레꽃만 있다.
그럴 때다.
배 고픈 아이가 찔레순을 따 입에 넣는다. 하루를 굶고 이틀을 굶어 입술이 하얗게 부르튼 아이다. 아이는 밥상머리에 달려들듯 찔레덩굴에 달려들어 찔레순을 따 먹다가 문득 돌아선다. 조용한 들판이 무섭다. 들판이 짐승처럼 달려들 것만 같다. 보리밭 골에 숨은 호렝이 한 마리 뛰쳐나와 다리 한 짝을 물어갈 것 같고, 문둥이 엉금엉금 기어나와 간을 달라고 조를 것 같다. 배 고픈 아이는 그만 운다.
타박타박 타박네야, 너 어드메 울고 가니
우리 엄마 무덤가에 젖 먹으러 찾아 간다
물이 깊어서 못 간단다
물 깊으면 헤엄치지
산이 높아서 못 간단다
산 높으면 기어가지
명태 줄라 명태 싫다
가지 줄라 가지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배 고픈 아이가 고적감에 휩싸여 울 때에 의지할 곳은 엄마 뿐이다. 아이에게 엄마만큼 크고 푸근한 울타리가 없다. 엄마는 우주를 덮는 하느님이다.
엄마는 지금 내가 배고픈 걸 다 알아 젖 달라면 옷고름을 풀어 젖을 줄 테고, 내가 지금 외로워 울고 있는 걸 다 알아 내 눈물을 닦아달라면 무명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아줄 테다.
그런데 어이할꼬. 그 엄마가 죽어 여기에 없고 저 먼 산에 있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사람이 건널 수 없는 강 건너 저쪽 세상이고, 구름 높은 저쪽 세상이 엄마가 있는 곳이다.
그렇대도 배고픈 아이는 간다.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제 8요일”의 조지처럼 간다면 엄마 곁으로 간다. 엄마 없어 홀대 받으며 서글프게 사느니 거기가 암만 멀대도 아이는 간다. 물이 깊으면 헤엄쳐 건너고, 산이 높으면 엎드려 기어가면 된다.
명태 줄 테니 가지 말라 해도 싫고, 가지 준대도 싫단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엄마 젖이다. 그 젖 한 모금이면 여지껏 배고파 운 허기 다 잊을 수 있고, 그 젖 한 번 만져보면 여지껏 받은 수모와 냉대와 외로움 다 지워낼 수 있다. 아이에겐 지금 명탯국에 가지 반찬 놓인 푸짐한 밥 한 상이 필요한 게 아니다. 위로 받고 싶은 엄마가 필요하다. 엄마 없이 사는 결핍의 세상이 원망스러운 것이다.
엄마 없는 세상을 타박타박 아이가 홀로 걸어간다.
가다가 수렁에 빠지거나, 가다가 산비탈에 굴러 떨어지거나 가다가 호렝이 밥이 될지도 모르는 험난한 세상길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저 혼자 간다.
민요, “찔레꽃”을 불러보면 ‘타박네’가 타박타박 걸어가는 길모퉁에 찔레꽃 한 무덕 하얗게 피어있을 것 같다. 노래 그 어디에도 찔레꽃 한 마디 없지만 왠지 그런 그림이 그려진다. 타박네가 가는 길은 먼지 풀썩이는 길이고, 그 길은 보릿고개를 넘는 고단한 5월의 길이고, 타박네가 입은 옷은 다 해어진 무명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일 것 같다. 누구나 머릿속에 그런 그림이 떠오른다면 그런 공통의 정서가 우리의 핏속에 녹아흐르기 때문이다.
예전, 찔레꽃 필 무렵의 우리의 산하는 목이 메이도록 배가 고팠다. 어쩌다 밥덩이 하나 생기면 남의 손에 빼앗길까 두려워 뒤란에 숨어 허겁지겁 먹었다. 그러다 체하면 하룻밤을 꼬박 새워 토하고 똥질하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측간이 무서워 마당 두엄더미 앞에 앉아 똥을 누다 우연히 쳐다보던 북두칠성. 똥질에 기운이 다 떨어진 우리를 지켜주던 건 그 밤 북두칠성이었다. 그 별은 사람의 명을 관장했다. 그 별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 어디 있을까. 그러했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 앉아 불과 5,60년 전의 과거를 넘겨다 볼 수 있다.
배고프던 시절엔 툭하면 체했다. 생일 떡을 먹어도 체했고, 잔칫집 잡채를 먹고 와도 체했다. 평소 부실하게 먹고, 그래서 원활하지 못해진 기운 때문에 자주 체할 수밖에 없었다. 너남없이 배고프게 살던 시절이었으니 의사는 없어도 체기를 따주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의 침은 있었다.
초여름 날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오라는 비는 없고, 아무리 밭뙈기를 들여다 봐도 감자 여물기는 이르고, 보리 익기도 이르다. 풀과 솔잎과 메마른 흙을 빼고 먹을 거라곤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땅이 원망스럽고, 가난이 원망스러웠다. 그럴 때에 가난한 집엔 자식이 많았고, 배를 굶다 죽은 아이들은 집집마다 있었다.
그 무렵 우리들의 밥은 아침과 저녁, 단 두 끼였다.
지금 배불리 먹는 아이들은 옛날에도 그 옛날에도 다들 배불리 먹고 살아온 줄 안다. 그러나 하루 세 끼 먹던 시절도 그래 오래지 않다. 대략 6.25 전쟁 이후라고들 한다. 그 이전에는 아침과 저녁만 있었다. 점심을 먹은지 불과 60년밖에 안 됐다.
먹는 일만 헐벗은 게 아니다. 입는 옷도 한 벌이 고작이었다. 그 한 벌로 흙을 묻혀 농사를 짓고, 그 옷 입고 잠을 자고, 그 옷 입고 일을 보러 다녔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던 날 프랑스 경찰에 잡힌 시민들 중 80퍼센트가 옷 한 벌로 인생을 살았다는 걸 안다면 다들 놀랄 거다.
그쪽이나 우리 사는 이쪽이나 힘없는 자들은 힘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하게 살았다. 옷 한 벌을 벗어보자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혁명을 일으켰고, 이쪽의 우리들은 개벽세상을 보자고 동학에 빠졌다.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이.”
장사익 선생이 부른 “찔레꽃” 한 구절이다.
이 순박한 ‘찔레꽃’ 노래를 들으면 어른들은 눈물을 흘린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목이 메어 운다. 그건 그 보잘 것 없는 찔레꽃 뒤에 숨은 보이지 않는 차별과 배고픔과 서러움과 역사적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아픔은 개인적인 아픔이며 동시에 공동체의 아픔이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다들 찔레꽃을 보면 서러워서 울었다. 촌수가 먼 남의 집 초상에도 거침없이 울었고, 이웃집 개 한 마리 병 들어 죽어도 울었고, 가뭄에 타들어가는 보릿골을 보고도 울었다.
그런데 지금은 울 일에도 울어지지 않는다.
안양 어딘가에 젊은 드라마 작가가 굶주리다 그만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는 기사를 봤을 때도 나는 울지 못했다. 무정한 현실에 대해 낙담은 했지만 울어주지 못했다. 왜일까? 나 역시 남의 고통을 외면하며 살아온 공범자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철조망 북쪽에서 100만의 사람들이 굶주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울려고 하기보다 그들의 체제를 탓하는 걸로 울음을 대신했다. 울 때에도 울지 못하는 까닭은 뭘까? 남의 아픔을 공감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중국의 대기근 소식을 듣고 식탁 위에 놓인 빵을 집지 못했다는 6살 시몬느 베이유가 생각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좀 울어주고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빈소에 엎드려 슬피 울던 누님들의 곡성이 그립다. 울음을 울음같이 목놓아 토해내던 그런 장엄한 울음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졌다.
찔레꽃 향기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우면산 찔레꽃 흐드러지게 필 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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