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감자순이 올라왔어요

권영상 2013. 5. 13. 09:27

감자순이 올라왔어요

권영상

 

 

 

 

 

드디어 감자순이 올라왔네요.

벌써 몇 주째 주말농장에 찾아갔지만 감자순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보았습니다. 감자 두둑마다 실궂하게 올라온 감자순을 보았습니다. 나는 대뜸 감자 이랑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감자순에 대고 부볐습니다.

“올라오느라 애썼다.”

나는 악수를 하듯 감자순의 이마에 내 이마를 대었고, 감자순은 내 뜨거운 이마를 식혀주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낯익은 사이로 살아온 사람처럼 그렇게 반가워했습니다. 그런 인사 뒤에 한 걸음씩 물러섰습니다. 초봄의 추운 일기 중에도 볕을 놓치지 않고 받아 감자는 기어이 올라왔네요.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답지 않게 튼튼하고 실합니다.

 

 

하나 두울 서이 너이 다 여…….

또 다시 세어봅니다. 쪽 고르게 올라온 감자순은 모두 18개. 한 이랑에 여섯 개씩 세 이랑이나 심었습니다. 하나도 빠진 거 없이 약속이나 한 듯 다 돋아났습니다.

생각할수록 기적 같은 일이 아닌가요?

한번 생각해 보아요. 주말농장이 있는 이곳은 집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의 서울입니다. 양재역이 가까운 청룡마을. 사람이 살기에 그리 편안치 않은 서울살림을 하며 감자밭을 가꾸다니요. 꿈만 같아요. 강원도 고냉한 산골짜기 아니면 강릉의 어느 청량한 들판에서 돋아나고 있을 감자잖아요. 그걸 이 서울에서, 그것도 내 손으로 키운 감자순을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요.

뭐 무너진 하늘을 일으켜 세우고, 바다를 갈라 그 안에 길을 만들어야만 기적인가요. 그건 우리와는 먼 초인적인 이들의 기적이고 우리 같이, 평범한 학교를 나오고 밥 먹는 일을 아직도 숭고히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에겐 감자를 심어키우는 일도 기적이라면 기적이지요.

 

 

서울이라는 차가운 빌딩 그늘에 몸을 감추고 산 지 27년이 됐습니다. 그렇게 눌러사는 내내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예전의 아버지가 하셨듯 내 땅을 일구며 살아야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누구나 다 그렇듯 그저 하나의 바램뿐이잖습니까. 성과급을 놓고 물어뜯기식 경쟁을 하는 이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살아내야 하는 사람에겐 그게 쓸쓸한 꿈이지요.

 

 

 

그런데 7년 전입니다.

3평짜리 손톱만한 주말농장을 분양받았습니다. 이걸 분양 받고 돌아와 나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마치 내 땅 십여 마지기의 땅문서를 들고 온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무슨 대지주나 된 듯 거기에 심을 오만가지 곡물을 생각했습니다. 콩도 심고, 참깨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호박도 심고, 호밀도 심고, 토란도 심고.......정말 그런 생각으로 나는 종잇장이 까매지도록 적고 또 적었습니다. 하루 종일 살아도 흙 한번 밟아보지도 못하는 서울에서 밭이라니요. 땅에서 까맣게 떨어진 4층 허공 위에 사는 내가 밭이라니요.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만나 뵈옵는 것 같았습니다. 제게 있어 흙은 아버지와 다름없지요. 사회생활을 배우기 이전에 나는 아버지의 등 너머로 먼저 흙을 배웠으니까요. 그날 나는 아버지를 뵙듯 내 3평짜리 밭을 몇 번이나 맴돌다가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엔 주말농장이란 게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으니까요. 도시에 살면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전혀 모르던 일이었습니다. 아내 친구의 도움으로 ‘주말농장’이란 말을 알게 됐고, 그분이 주말농장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주로 상추, 쑥갓, 고추 등속을 심었습니다. 옥수수도 심어보고 토마토도 심어 가꾸었습니다.

상추며 쑥갓을 키우고, 고추를 심고 자라는 것을 볼 때면 사뭇 신기했습니다. 상추 잎을 따오고,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따올 때도 재미있고, 안전한 먹을거리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 감자순은 아닙니다. 좀 뭉클한 감정이 있었습니다. 이걸로 주식을 대신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런 걸까요. 감자 눈을 따서 감자 이랑에 심을 때도 그랬지만 두둑을 떠 헤치고 돋아나는 감자순을 볼 때도 그랬습니다. 감정이 북받치고, 가슴이 찡했습니다.

 

 

 

고향에 살 때 아버지는 꽤 큰 감자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감자밭은 경포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집 뒤에 있었습니다. 800여 평, 그 밭이 모두 감자꽃 피는 감자밭이었습니다.

감자순이 돋기 시작하면 아버지를 따라 감자밭에 가 김자김을 맸습니다. 그 너른 밭을 매려면 하루 가지고는 안 되지요. 한 이틀 사흘은 밭에다 땀을 쏟아야 합니다. 그런 노동이 끝나고 나면 이번에는 감자 이랑 사이에 아버지는 강낭콩을 심으셨지요.

 

 

강낭콩 순이 나오고, 감자밭 김을 두어 번 더 매고 나면 감자꽃이 피지요. 참 볼만하지요. 감자꽃, 그것도 꽃이냐고 하겠지만 자주나 흰 감자꽃은 고상합니다. 바람에 꽃잎이 뒤집히는 그런 경박한 꽃이기 보다는 평생을 땅과 함께 산 농사꾼의 아내 같은 너그러운 미덕이 있지요. 감자꽃 피면 보릿고개를 간신히 넘기는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감자꽃은 배곯는 이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신호였지요.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감자가 굵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그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 미덕을 가진 꽃인가요?

 

 

 

그렇게 잘 가꾼 감자는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지요. 감자의 할 일은 그뿐이 아닙니다. 감자에서 농사를 짓느라 든 비료 값을 빼고, 품삯을 빼고, 당장 필요한 학비를 뺐지요. 농사를 짓는 사람도 등골이 빠지고 감자도 등골이 빠집니다. 그렇게 당장 현금을 만들 수 있는 아버지의 현금 창구가 감자였습니다. 그러던 감자밭 문서를 형님이 투전판에다 날렸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만 그때는 이미 아버지의 힘이 많이 떨어졌을 때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형님을 더는 어쩌지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아버지 지으시는 일 년 농사의 한 옆구리가 뭉텅 떨어져나가고 말았던 거지요. 아버지는 그 뒤로 의욕을 잃고 계시다가 일흔일곱의 연세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우리 집 800평 감자밭은 영영 남의 손에 넘어가고, 우리는 그 감자밭 길을 갈 때면 그 밭을 애써 외면하며 걸었습니다. 도저히 감자밭을 볼 면목이 없었지요. 그렇게 허무하게 아버지의 감자밭을 잃고 말았습니다.

 

 

 

봄이면 첫눈을 맞으며 감자밭에 감자씨를 넣고, 이른 여름이면 올감자 맛을 보며 사시던 아버지도 가시고, 형님도 이제는 다 가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역사가 이렇습니다. 힘들여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자가 있는가 하면 또 다음의 누군가가 이런 저런 일로 그걸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5년이 가고, 10년이 가고, 바람이 불고 또 비가 오듯이 30여 년의 세월이 갔습니다. 숫자로야 30여 년이지만 그 세월의 시간 시간에 배인 기억들은 무량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나이가 벌써 그 옛날 아버지의 나이에 와 있습니다. 별것 아닌 감자순 하나에 이렇게 많은 회한이 서려있네요.

다음 주에는 감자 이랑 사이에 아버지가 하시던 대로 강낭콩을 심어야겠습니다. 오랫동안 인생을 살아보니 아버지가 사시던 대로 살 때의 내 마음이 가장 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