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퇴직원을 내며
권영상
수업종이 납니다. 나는 책과 수업준비물을 들고 부지런히 내 방을 나섭니다. 내 방 문을 열고 나가면 복도가 나옵니다. 나는 이 복도에서 왼쪽으로, 그러니까 북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러나 작년까지만 해도 으레 오른쪽, 그러니까 남향 복도를 따라 갔습니다. 그런 까닭은 오른쪽 복도로 가는 길이 왼쪽보다 교실로 가는 게 가깝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는 교실은 4층입니다. 거기에 3학년 교실이 있습니다. 3학년 담임과 국어를 5,6년 넘게 맡았습니다. 나는 그 동안 빠르다는 이유로 오른쪽 남향 계단을 애용했습니다. 그쪽 계단은 빠르긴 하지만 바깥을 내다볼 창문이 없다는 게 흠입니다. 그래도 대부분 동료들이 오르내리는 계단이 이 남향 계단입니다. 여럿이 함께 가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래서 오르내리기도 수월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이 남향 계단길을 버렸습니다.
우연히 건물 북쪽 계단을 내려오다가 바깥을 내다봤습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가 가게들이 한 눈에 내려다 보입니다. 과일 가게, 약국, 화장품 가게, 떡뽁이가게, 잡화점, 문방구, 정육점이 보이고, 그 앞을 지나가는 바쁜 사람들과 자전거에 오토바이까지 다 보입니다. 예전에는 이 풍경을 못 보았을까요? 아닙니다. 수없이 보았지요. 그런데도 그 풍경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왔던 거지요.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사람 사는, 이 번잡한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늘 보던 그 풍경이 그 풍경인데도 그날은 달리 보였습니다. 나는 다음날부터 내 방에서 나오면 오른쪽이 아닌 왼쪽 복도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물론 처음 일이 주 동안은 습관대로 오른쪽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가다가 문득 생각나면 다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다른 이들 모두 남쪽 계단을 오를 때 나 혼자 북향의 계단을 오르는 외로움도 있었습니다. 어떻든지 수업을 마치고 내려올 때도 북향 계단으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면 한 층 한 층 내려오며 창밖을 내다 봅니다. 흘러가는 시간과 계절이 다 보입니다.
어느 날에는 길 건너 2층집 옥상에 백합이 핀 걸 보았습니다. 늦은 봄인가 봅니다. 고운 백합꽃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백합 곁에는 화분에 심은 라일락이 피고 있었습니다. 희미하긴 하지만 보랏빛입니다. 이쪽 집엔 옥상 옥탑방 앞에 해바라기 줄기가 길게 올라와 있습니다. 아마 여름쯤이면 꽃판 가득히 노란 꽃을 피울 테지요. 그렇게 내려오다 또 어느 날은 길에서 싸우는 이들을 봤습니다. 쓰러진 자전거를 두고 싸우는 걸 보니 서로 부딪혔나 봅니다. 멱살을 잡고 어우닥질칩니다. 사람 사는 그 모습이 꼭 내 모습 같습니다.
나는 그 무렵부터 좀 멀기는 해도 북향의 계단을 오르내립니다. 남들이 안 가는 그 계단길을 찾아 오르내리는 데에 무려 5,6년이 걸렸습니다. 나는 그 동안 아무 생각없이, 남쪽 계단길이 좀 빠르다는 이유로 습관처럼 다녔지요. 4층으로 가는 길이 오직 그 길밖에 없다고 여겼던 거지요. 늘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꾸는 데 그렇게나 많은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집으로 퇴근하는 방법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나는 늘 3호선 전철만을 고집했습니다. 그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좀 돌아가고, 여러 번 갈아타더라도 4호선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전철만 고집한 건 아닙니다. 버스정류장이 좀 멀더라도 불편한 버스를 일부러 탔습니다. 전철도 같은 역이 아니라 한 역 전에서 내리거나 한 역 뒤에서 내려 걷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승용차를 몰아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참 많았습니다. 익숙하고 습관에 젖은 편한 길만이 '좋은 길'이라 믿고 다니는 동안 나는 너무도 많은 또 다른 길의 정취와 아름다움과 풍경을 잃고 지냈습니다.
오늘 나는 명예퇴직원을 써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표를 낸 셈이지요. 아직 30개월이나 더 직장에서 일할 기회가 있는데도 직장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왜 직장을 그만 두느냐고, 아는 이들이 말렸습니다.
“직장을 버리고 나가면 자네에 대한 크레디티가 사라진다는 걸 생각해 보게. 직장 없는 사람, 사회가 대접이나 해주는 줄 아는가!”
나도 그 문제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쉽게 말해 직장이 있으니까 헌 구두를 신고 다녀도 되고, 좀 해진 옷을 입고 다녀도 되고, 수염을 좀 길러도 되고, 머리 염색을 때맞추어 안 해도 되고, 넥타이 대신 면바지를 입어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이렇다 하게 할 일이 없어 배낭을 메고 가족의 눈을 피하듯 서울 근교의 산을 쫓아다니거나, 교외행 공짜 전철을 타거나, 공공시설에 모여 잡담을 하는 은퇴자들의 비애도 압니다.
“여보,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요.”
아내도 나의 생각을 막았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고, 관리비를 내야하고, 아파트 융자를 갚아야 하고, 애 결혼도 시켜야 하고, 보험료를 내고, 세금을 내고,..... 몰라 그렇지 옷값이며 외식비며 책값이며 교통비에 휴대전화비까지.....”
아내의 말마따나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그걸 모르고 멋으로 사퇴원을 낸 건 아닙니다. 다달이 받는 월급이 나의 목숨을 집단 속에 버린 댓가라고 불평했지만 나는 그 댓가로 버젓이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현실이 그런데도 나는 이제 그만 두기로 했습니다. 직장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그 길들 때문입니다.
나는 늘 같은 길만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느라 내가 가보지 못한 그 길에 백합이 피고, 라일락이 피고, 여름이면 해바라기가 피는 걸 외면하며 살았습니다. 그 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길이 아닌 이쪽 길을 끝까지 가야하는 건 나를 속이는 일입니다. 좀 고단해 그렇지 갈림길의 이쪽만이 아니라 저쪽에도 이쪽만한 행복이 있다는 걸 압니다. 그게 좀 배 고프고 헐벗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해도 행복은 행복이지요. 나는 인생에 이런 비밀이 있다는 것쯤 삶을 통해 눈치챘습니다. 쓰디쓴 희생 없이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바빠도 돌아서 가려무나.”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돌아가는 길에 분명 무슨 비밀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깨달음이, 우리가 바라보지 못했던 세상이 거기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이제 청년 시절에 가던 그 빠른 길을 버리고, 내가 여태 가보지 못한 돌아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길 없는 개울에 징검돌을 놓고가듯 내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기로 했습니다. 징검돌을 들 힘이 있을 때가 내가 떠날 때입니다. 그 길이 지금보다 더 쉽고 빠른 길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나의 명예퇴직에 대한 승락이 떨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가 내년 2월입니다. 그때까지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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