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조장희 선생님에 대한 추억

권영상 2012. 12. 17. 12:06

 

조장희 선생님에 대한 추억

권영상

 

 

 

 

 

나이 칠십, 어느덧 소년은 나이를 그득히 먹었다. 그리고 희귀한 파킨슨씨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 청원군의 조그마한 땅으로 돌아가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 그 소년에겐 아직도 멀리 떠나보내지 못한 채 홀로 은밀히 간직한 과거가 있다. 열한 살에 떠나보낸 아버지, 기관사였던 그 아버지라는 과거다. 그때 소년의 나이 열한 살. 소년은 단 2년이라는 아버지와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생부와 사별한다.

그 소년이 가슴 속에 눈물처럼 눈물처럼 간직한 그 아스라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한 권의 동화로 끌어내었다. <꽃나라를 달리는 기관차>. 그 소년이 동화작가 조장희 선생님이다. 요 며칠 전 병환 중이신데도 손수 사인을 하셔서 내게 책을 보내주셨다.

 

 

내가 조장희 선생님을 깊이 알게 된 건 1993년부터다.

오랫동안 시를 써오던 내가 무슨 생각에선지 MBC창작동화 공모전에 동화 ‘쥐라기 아저씨와 구두’를 내었다. 그게 당선되었는데 선생님이 심사를 하셨다. 그 무렵 선생님께선 동화를 쓰시면서 중앙일보 여성중앙부에 편집국장으로 계셨다.

마도로스 모자에, 넥타이 대신 실크 머플러를 늘 하셨다. 멋쟁이셨다. 여성중앙부 팀들도 선생님을 따랐다. 중앙일보사에서 ‘우리 작가 새 동화’라는 시리즈가 나왔을 때 내 장편동화 ‘춤추는 원숭이 치치’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아마 그때로부터 ‘인사동의 밤’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주로 인사동 학고재 골목 ‘이모집’이 우리가 만나는 아지트였다. 이상교, 강원희, 이규희, 송재찬 형, 사진작가 황헌만 형, 조장희 선생님 등이었다. 그 자리의 중심엔 언제나 조장희 선생님이 계셨다. 술자리가 반쯤 무르익어갈 때면 선생님은 어김없이 술상 앞에서 조으셨다. 약주를 좋아하시고 이야기를 좋아하신 분이었지만 술에는 약하셨다. 술은 자정이 넘도록 마셨는데 술자리가 파할 때에야 깨어나셔서 태워드리는 택시로 귀가하셨다.

 

 

 

그때는 모두 40대라 작품 활동도 왕성했다. 나도 그 무렵엔 한 해에 동시집 한 권과 동화집은 두세 권씩은 냈었다. 퇴근을 하면 언제나 내 발길은 집보다 먼저 인사동으로 향했다. 날마다 술에 취했지만 펜은 취하지 않았다. 야심만만했다. 이른 새벽에 집에 귀가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출근에 늦은 적이 없었고, 하루도 글을 쓰지 않은 날이 없었다. 출판사 <책 만드는 집>의 시조시인 최영재 사장을 만나던 때에도, 그 중간엔 조장희 선생님이 계셨다. 그때는 출판 계약을 하고 나면 인사동에서 술을 마셨다. 작가들 뿐 아니라 편집자들도 인사동에 모였다. 술집을 옮겨 앉을 때마다 어제 본 편집자를 또 만나고, 갓 출판계에 들어온 신참 편집자의 인사도 거기서 받았다. 그 시절 글의 7할은 인사동에서 쓴 셈이다.

 

그때의 선생님 작품집 <개미와 꽃씨>는 짧은 동화의 백미였다. 어쩌면 우리 동화의 격조를 한 단계 이끌어 올리신 작품이기도 했다. 그 후 <괭이 씨가 받은 유산>도 품격 있는 동화였다.

 

그때, 동화작가 이상교 강원희 이규희씨들이 내뿜는 문학적 열정은 밤을 태울만 했다. 술 실력도 술 실력이지만 노래도 문학 못지않았다. 1990년대. 우리의 술문화에 빼어놓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가라오케와 그 후에 나타난 노래방이었다. 술을 마신 후면 반드시 노래방을 거쳐야 술은 끝이 났다. 마치 전국민을 ‘카수화’ 하려는 듯이 노래방 문화는 전국적으로 번졌다. 그때 즐겨 부른 노래들이 있다. ‘모자이크’, ‘향수’, ‘기억’,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등이었다. 물론 그렇게 열창을 하느라 소란한 중에도 조장희 선생님은 소파에 누워 코를 고셨다.

 

 

1990년대가 저물어 가면서 우리들의 인사동 출입도 그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고향 청원으로 아예 내려가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파킨슨씨병이라는 거였다. 한번 가뵈어야지, 뵈어야지 하며 가끔 편지를 드렸다.

돌아오는 답장 속엔 청원의 안마당이 온통 채송화 꽃으로 뒤덮여 있다고 하셨다. 그 마당에서 가을 오후의 햇빛이 번쩍일 일을 상상했다. 그건 또 얼마나 황홀하고 또 때로 눈부실까. 뜨락 어딘가에 휠체어를 타고 나와 채송화 마당을 굽어보고 계실 선생님을 생각했다.

 

 

그 때 내 나이가 40대 후반이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인사동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물론 함께 어울렸던 이들의 안부도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들었다. 그들 역시 나와 같았다. 인사동의 과거는 이제 한 때의 추억 속으로 사라진 화양연화와 같았다. 그 후, 만날 일이 있어 술이나 한잔 하자 하면 다들 뒤로 물러섰다. 시들했다. 혹 모인다 해도 예전 같은 뜨거움이나 격렬함이나 열정이 식어 있었다.

“다음에 봐.”

헤어질 땐 기약도 없는 인사를 하고 쓸쓸히 헤어졌다.

 

 

 

 

그런 쓸쓸한 만남조차도 없어진지 벌써 오래다. 10여 년이 지났다.

그러던 때에, 그러니까 그 과거를 까맣게 잊고 있을 때에 조장희 선생님께서 동화집 <꽃나라를 달리는 기관차>를 내셨다.

나는 그때의 그 아름다웠던 시절과 동화 속에 담겨 있는 60여 년 전, 아버지에 대한 애잔한 추억의 이야기를 다 읽고 편지를 드렸다. 그 동화집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꽃나라를 달리는 기관차>는 아버지를 회상하는 지난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고, 후반부의 <새 무지개 한 자락>은 태어나기 전의 손자와의 대화를 나눈, 새로운 시작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편지를 보내드리고 한 일 주일쯤 되었을 거다.

일요일, 집에 박혀 있는데 내 휴대폰이 울었다.

“궈궈권영상씨?”

나는 휴대폰을 귀에다 바짝 가져다 댔다.

“나, 나 조장희야.”

조장희 선생님이셨다.

말소리가 못내 어눌하셨다. 나는 여태 찾아뵈지 못한 죄스러움 때문에 목소리를 높여 반겼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과 소홀함, 선생님의 힘드신 투병, 그리고 그간의 안부를 소나기같이 여쭈었다.

“펴편지 잘 받았어. 뭐, 그그런 대대로 살만은 해. 방학이지? 방학하면 하한번 놀러와. 밥도 와 머먹꼬.”

나는 마음먹은 대로 찾아뵙지 못하는 심정을 말씀 드렸다. 내 말을 다 듣고 계시던 선생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 그때, 사사사람들 좀 마 만나?”

 

 

 

 

 

 감이 멀어서 그런지 선생님 목소리가 추억에 젖어 있었다. 얼른 듣기에도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 시절이라면 인사동 시절이 틀림없다. 가깝다면 청원도 가까운 곳이지만 통행이 서로 안 되는 그 곳이 막막하다면 막막할 수 있겠다. 몸도 온전하지 못하시니 더욱 그 시절이 그리우실 테다. 몸이 성치 못하신 선생님 연세가 벌써 일흔이면 이제는 지난 인생을 돌이킬 수 없다. 그 연세와 몸으로 지난 일을 생각하면 그때가 어쩌면 몹시 그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들조차 이제는 다 뿔뿔이 흩어져 저들의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 산다. 오히려 허전하다고 한다면야 선생님만큼 여기 흩어져있는 우리들도 허전하다. 지나간 과거는 모두 다 사람을 허전하게 한다.

“서로 본지 오래 됐어요.”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왠지 빈 허공을 후비다가 힘없이 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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