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식에도 못 가는 얼띤 애들
권영상
관악산 밑 신림동에 살고 있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 그 친구 아들이 제가 살고 있는 동네의 대학에 합격했다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다. 그 대학이라면 누구나 보내고 싶어하는 국립대학이다. 그 대학에 아들을 보낸 친구가 세상에 뭐 이런 애가 다 있냐며 분통을 터뜨린다.
“대체 이런 애라니? 이런 애가 누군데?”
내가 물었다.
“우리 애.”
우리 애라면 그 명문대학에 들어갔다는 애다.
“글쎄, 요 며칠 전 대학 입학식에 애를 보냈는데......”
친구는 하도 어이없는지 한숨을 내쉬다 말고 말을 끊었다. 대학이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아 버스 번호를 일러주고 타는 곳도 일러주고 그러고는 직장에 나갔단다. 입학식이 끝날 때쯤 해서 혹시나 하고 집에 전화를 했더니 아들이 받더란다. 어쩐 일로 집에서 전화를 받냐니까 글쎄,
“버스를 타긴 탓는데 내릴 데를 몰라 그냥 타고 돌아왔어요.”
하더란다.
“정말 웃기는 애 아니야? 먼데도 아닌 제 동네 대학에.”
“아, 그럴 수도 있지뭐. 길 못 찾아간 게 뭔 대수라고.”
나는 그렇게 대꾸해줬다.
그러면서도 거 참, 쉽게 이해가 안 갔다. 대학에 갈 정도로 나이 먹은 애가 제가 합격한 대학을 못 찾아가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딱한 아이 중에 내 딸아이도 있다. 딸아이는 미국 대학의 합격 통지를 기다리느라 명륜동에 있는 대학에 수시 원서를 내어 합격을 했었다. 이 녀석도 몇 해전 그 대학 입학식에 찾아갔다가 그냥 돌아왔다. 왜 그냥 왔냐니까 ‘몰라’ 했다. 몰라라니! 나보다 더 딸아이를 딱하게 여긴 사람은 같은 여자인 아내였다.
아내는 속이 타는지 딸아이 방에 들어갔다. 그러더니 한참만에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나왔다. 아내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학교까지 찾아가긴 갔는데, 입학식장이 어딘지 몰라 여기 저기 물어보다 시간도 지나고 해 그냥 왔다는 거다.
"그래서 그냥?"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 시간에 입학식장 찾아가는 사람만 천여 명은 되었을 텐데, 그들 행렬만 따라가도 찾지. 어떻게 된 애가 거기까지 갔다가 그냥 되돌아 올까?”
아내가 딸아이 방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건 좀 그렇네.”
나도 입을 쩝, 다셨다.
“저런 애가 대학 가면 공부나 제대로 할까?”
아내가 물 한컵을 들이켰다.
그게 뭐 별 거 아닌 일이지만 그냥 되왔다는 게 솔직히 사람을 좀 심란하게 만들었다. 서울이 암만 복잡하고, 입학식장 안내판이 불성실하게 표시되어 있다해도 그렇지.
“당신 닮아 저렇게 얼띤 거 아니야?”
아내가 화살을 내 쪽으로 돌렸다.
“아니, 내가 그렇게 보여?”
나는 대뜸 대꾸를 하고 일어나 베란다에 나갔다. 창밖으로 밀려드는 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괜히 큰소리만 치고 살았지, 내 마음 한 구석에도 딸아이와 같은 얼띤 면이 있기는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때였다.
중학교까지는 집에서 시오 리, 6킬로미터 거리였다. 우리가 사는 마을을 지나고, 이웃마을 윗뜰 벌판을 지나면 남대천이라는 큰 시내가 나온다. 그 시내를 건너 방죽 너머 산비탈에 중학교가 있었다. 그 중학교가 내가 입학식을 치르러 갈 학교였다.
3월이어도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은 모두 바빴다. 나는 아침 일찍 처음 입어본 중학교 교복을 차려 입고 혼자 집을 나섰다. 새로 사 입은 검정 교복에 검정 모자는 나를 쑥스럽게 했다. 아버지와 함께 가끔 읍내에 갈 때, 남대천 제방 건너편 산기슭에 있는 흰색 건물의 학교를 본 적이 있다. 또 입학 시험을 치르러 몇 달 전에 가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좀 추운 3월의 날씨는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아직 서릿발이 녹지 않은 아침 길을 혼자 외롭게 걸었다. 우리 동네에서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는 나 혼자였다. 나 혼자 소나무길을 지나 기차가 다니는 철길을 쭉 따라 걸었다. 이 아침에 길을 가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암만 가도 학교가 나오지 않았다. 계면쩍고 부끄러운 마음에 학교 길이 멀게만 느껴졌던 거다. 윗뜰 논벌을 다 건너고 남대천 제방 위에 올라섰을 때다. 제방 건너편의 희고 큰 중학교 건물을 보자,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 모여드는 아이들과 함께 당당히 그 학교 교문에 들어설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제방둑 바위에 기대어 서서 신발코로 애먼 흙만 걷어찼다. 이제 13살밖에 되지 않은 아직 촌티나고, 막내로 응석이나 피던 나의 얼띤 본성이 거기서 드러났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자꾸 일어났다.
“보아하니 너, 입학식에 가는 모양이구나!”
지나가던 중절모를 쓴 아저씨 한 분이 머뭇거리는 내게 다가왔다. 나는 간신히 "네"하고 대답했다. 그분은 그런 나를 남대천 시냇물에 놓인 징검돌을 건너 중학교 교문 안, 입학식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저씨는 중학교도 못 다녔다. 널 보니 괜히 네가 부러워 예까지 오게 됐다.”
그분은 내 어리숙한 모습이 안쓰러웠겠다. 내게 그렇게 용기를 주시고는 돌아서셨다. 모르기는 해도 그때 나는 그분에게 고맙다는 인사의 말도 제대로 못 했을 성 싶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그 분을 못 만났으면 학교 공부는 거기서 끝났을지 모른다. 그 만큼 그때의 나는 얼띠었다. 쉬운 말로 숫기가 없었다. 딸아이도 어쩌면 나처럼 숫기가 없어 대학 교정을 헤매다가 그냥 돌아왔을지 모른다. 암만 내가 낳아놓은 자식이지만 그런 부끄러웠던 과거까지 어떻게 그대로 물려받는지.......
“입학식에 못 가는 게 뭔 대수라고! 입학식에 못 온 애들만도 반은 넘을 걸.”
나는 베란다 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서며 딸아이가 들으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 딸아이가 저 혼자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버젓이 직장생활을 한다.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나 다 똑똑할 수는 없나 보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루묵에 대한 추억 (0) | 2012.12.23 |
---|---|
수녀님의 완쾌를 기원하며 (0) | 2012.12.23 |
하늘은 가지마다 붕대를 감는다 (0) | 2012.12.20 |
조장희 선생님에 대한 추억 (0) | 2012.12.17 |
뒤뜰의 모란 (0) | 2012.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