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수녀님의 완쾌를 기원하며

권영상 2012. 12. 23. 23:08

 

 

 

 

 

 

수녀님의 완쾌를 기원하며

권영상

 

 

 

지난 연말에 수녀님께 메일을 드렸지요. 그간에 잘 계시는지, 해서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몸이 안 좋으시다는 소식 때문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누가 몸이 안 좋다, 누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들으면 좀 무섭습니다. 하도 무서운 병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조심조심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지요. 밥도 잘 자시고, 잠도 잘 주무시고, 좋은 생각만 하시면 이 겨울이 가고 나면 필시에 일어나실 거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단한 시련도 깨끗하고 좋은 생각만 하는 사람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만 하며 사는 이가 곧 하늘이니까요.

 

근데 하루 지나고 보니 답장이 왔습니다.

피정 중이라 주소를 잘 모르겠으니 주소를 좀 알려달라는 내용입니다. 수녀님의 시로 만든 탁상 달력을 보내주시겠다는 겁니다. 참 반가웠습니다. 달력을 주신대서가 아니라 그러실만큼의 힘이 있으시다는 뜻 때문입니다.

 

나는 얼른 주소를 적어 이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후 우편물이 왔습니다. 받아보니 수녀님의 “꽃시” 12편으로 만든 예쁜 달력입니다. 위에는 달력이 있고 아래쪽엔 시와 그림이 있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수녀님께서 손수 쓰신 달력 맨앞의 편지글입니다. 얼핏 보면 연인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글 같습니다. 언젠가 법정스님과 주고 받으신 편지글을 읽으며 ‘야, 이건 연애편지 같다’ 했습니다. 범속함을 다 떠난 뒤에 남는 맑은 영혼들이 쓰는 말에는 성과 속이 따로 없을 테지요.

 

 

  

“Dear 권영상 나무시보님께”

나는 중학교 시절의 펜팔을 제외하고는 여태껏 ‘Dear'이라는 정중한 편지 관용어를 들어본지 오래입니다. 국어를 가르치고 우리 말로 시와 동화를 쓰고, 산문을 쓰고 그런 한글 작업만 해서 그랬을까요? 갑자기 소년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지요.

“2012년 새해에도 건강하고, 밝은 동시로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세요. 출퇴근 길의 걷기를 통해 떠올려지는 새로운 작품들도 기대할게요. 건강을 기도하며.”

제가 보내드린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수녀님한테서 편지를 받을 때마다 놀라는 게 있습니다.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악필도 악필이지만 소녀 취향의 장식입니다. 하트 모양, 높은음자리표, 딸기, 11분음표, 장미꽃 등의 스티커들이 글 단락의 처음과 끝 부분에 꼭꼭 붙어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빨강색 색연필로 별모양의 꽃을 그리고, 초록색 색연필로 풀 대궁이를 그리고, 과일열매를 그리십니다. ‘좋은 생각만 합시다’란 반짝이 스티커도 빈자리에 붙이십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바다 물결 모양의 사인까지 공들여 하십니다. 편지를 다 읽고나서 그 편지를 한 눈에 들여다 보고 있으면 재미난 그림 하나가 떠오릅니다. 미술 숙제를 내기 위해 스케치북 앞에 앉아 고개 숙여 뒷손질을 하는 한 소녀. 깨끗한 16살 소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요즘은 손으로 직접 쓴 편지가 문화재만큼 귀한 때입니다. 저도 일 년에 한두 권의 책을 출간하여 문단 문우들에게 보내드릴 때가 있습니다. 받는 이들은 ‘책이군’ 하고 말지만 그 한 권을 보내드리기까지의 과정은 보통 번거로운 게 아닙니다. 속표지에 서명을 하고, 주소를 찾아 봉투에 적고, 봉투를 붙이고, 우체국에 가져가 우표를 사서 붙여 보내는 일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가끔은 최소한의 분들에게만 보냅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저와 다르십니다. 서명을 하기만도 힘든데 색연필과 스티커까지 동원해 보내드리는 기쁨을 낱낱이 드러내십니다. 그걸 즐기시는 거지요. 보통의 여유로운 마음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수녀님이 보내주신 7월의 달력에 “능소화 연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렇게

바람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나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도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바람 부는 날, 나무 아래에서 그분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당신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 그리움은 그분의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내 곁에 선 나무가 들으면 나무는 얼마나 섭섭할까요? 풀과 새와 바람이 들으면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분이 그들이 아니라 당신임을 알면 얼마나 섭섭해할까요? 하고 안쓰러워 합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분은 그분밖에 없다고 못 박습니다.

 

 

 

수백 번 입으로 외우는 기도보다

한 번 크게 용서하는 행동이

더 힘있는 기도일 때도 많습니다.

 

 

누가 나를 무시하고 오해해도

용서할 수 있기를

누가 나는 속이도 모욕해도

용서할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하며 무릎을 꿇습니다.

 

 

 

2004년에 나온 <기쁨이 열리는 창> 속에 들어 있는 “용서의 기쁨”이라는 시의 5,6연입니다. 수백 번을 말로 외는 기도보다, 단 한 번의 타인을 향한 용서가 참다운 기도라고 합니다. 수녀님께서 왜 전 생애를 걸고 당신에게 기도하는지 알겠습니다. 타인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엄마,

난 엄마가

내 앞에 계셔도

엄마가 보고 싶어요.”

 

 

동그랗게 웃음짓는

동그란 아이를 끌어안는

동그란

그리움 속의 엄마

 

 

“그래

나도 네가

내 앞에 잇어도

네가 보고 싶단다.”

 

 

 

수녀님에게 그리움은 아득한 유년 때부터입니다. 이 시는 1992년에 나온 <엄마와 분꽃>의 “엄마와 아이”입니다. 당신은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아니면 바로 내 앞에 있을 때에도 나는 당신이 그립습니다고 합니다. 지울 수 없는 원초적인 그리움입니다.

 

  

수녀님의 시는 아주 쉽고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어디 세속과 먼 데에 홀로 가 머물러서 인간이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의 세계를 노래하는 게 아닙니다. 비록 성의 세계에 몸을 담고 있어도 세속의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외로워하고, 삶과 노동에 지쳐하는 일상을 같이 그리워하고 아파한다는 겁니다. 그게 수녀님 시의 매력입니다. 멍든 군상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같이 슬퍼해주는 임무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수녀님께서 초인이길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초인이 되신다면 우리는 수녀님 한 분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곁에서 우리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주시는 분이기를 원합니다.

 

 

바라건대 수녀님의 완쾌를 기원하며, 수녀님의 풀꽃같이 신선한 웃음을 함께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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