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면 그리워지는 것들
권영상
첫키스, 첫사랑, 첫날밤, 첫새벽, 첫술, 첫물, 첫인사, 첫추위, 첫서리, 첫경험, 첫눈.......
모두 가슴 설레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쪽에서 보면 이미 지나간 과거사들이고, 저쪽에서 보면 다가올 미래의 말이다. 지나간 과거사로 보면 하나하나가 영상처럼 선하여 그립고 그리워지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금요일이다. 첫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갑자기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12월에 접어들기도 전에 첫눈이 오다니! 첫눈이 그렇게 금방 올 리 없다. 첫눈이 첫눈이려면 적어도 애타게 기다리던 성탄제를 넘기고 와야 한다. 내 기억 속의 첫눈은 항상 오랜 기다림 끝에 왔다. 그 기다림이란 오지 않는 구우에 대한 그리움과 똑 같다. 첫눈이 그렇게 금방 온다면 그건 첫눈이 아니다. 재미없다. 첫키스가 그러하듯, 첫사랑이 그러하듯 소망이란 게 금방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기다리다 가슴이 멍들고, 가슴이 다 패여나고, 가슴이 뻥 뚫려날 즈음에 와야 한다. 그것도 지쳐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돌아설 때쯤 너무도 뜻밖에 오는 것이 첫눈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날 저녁은 괜히 눈길이 창밖에 가 머물렀다. 바람 한점 없이 조용한 오후다. 낮게 뜬 구름은 젖은 솜처럼 무겁고 부드럽다. 공기의 무게가 내 피부에 느껴진다. 밤 7시쯤부터 정말이지 찬 싸락눈이 내렸다. 나는 목도리를 하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이 나이에 눈을 맞으러 나간다는 게 쑥스러웠다. 나는 무슨 볼일이나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정문을 나섰다.
겨울이 오면 그리운 게 첫눈 말고 또 있다. 어머니다. 왜 어머니뿐이겠는가. 나를 낳아주신 육친이 모두 그립다. 육친에 대한 그리움은 길고긴 겨울밤을 통해 가슴으로 찡하게 울려온다. 바쁜 철에는 육친을 그리워할 겨를이 없다. 밤의 무게가 지긋하고, 시련에 부딪히는 긴 삼동의 겨울에야 느낄 수 있다.
따끈한 아랫목. 아랫목엔 구들장 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늘 이불을 펴놓았다. 학교에서 발발거리며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호호호 불던 내 손을 이불 속에 밀어넣어 주셨다. 그리고 내 얼굴을 따뜻한 두 손으로 감싸주셨다. 그때 그 따뜻하던 이불속과 어머니의 손. 그 모두가 이 겨울 그립다. 그 때, 어머니 손에서 나던 콤콤한 냄새! 어머니는 겨울이면 손수 두부를 만들고난 비지를 띄우시려고 윗목에 둔 비지 양푼에 이불을 덮어 두셨다. 그 콤콤한 냄새가 어머니의 손에서 났던 것이다.
그 시절 겨울 안방에는 아랫목 이불말고 화로도 있었다. 밥을 짓는 연료는 나무뿐이었다. 장작이 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화롯불을 위해 어머니는 장작 몇 개비씩을 밥짓는데 썼다. 잉걸불 화로에 된장국을 올려 저녁을 먹고 나도 겨울밤은 길었다. 속이 굽굽하면 화로에 밤을 묻었다. 때로는 날달걀을 묻기도 했다. 날달걀은 젖은 신문지로 감싸 묻으면 타지 않고 뜨거운 열기로 달걀을 맛있게 익힌다. 그걸 묻고 부젓가락으로 불을 꼭꼭 눌러놓은 뒤 어머니는 옛날이야기를 꺼내셨다.
“각설하고, 조선 인조 연간에 한 여자히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박씨라. 얼골이 박색인지라 집안 사람은 물론 남편 시백조차 그를 꺼려하여 가까이 하지 아니하는도다.”
어머니는 글자 한자 틀리지 않고, 그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옛날이야기는 어머니가 애지중지 아끼시던 <박씨부인뎐>이다. 시집을 오실 때에 손수 필사하신 거였다는 데 얼마나 많이 읽으셨는지 한자도 어긋남이 없이 외셨다.
“하루는 박씨가 후원 초당에 나와 천기를 보고 대경실색하여 말하기를, 이는 분명히 북쪽 오랑캐가 침입할 형세로다. 하고 남편 시백을 은밀히 불러 임금께 아뢰라 하더라.”
그렇게 어머니가 읊조리시면 우리 뒤에 앉으셨던 아버지는 “과연!” 이라 말을 맞추어주시든가 아니면 “저런!”이나 “아하!” 하며 어머니 흥을 돋우셨다.
그 옛날이야기는 호랑이가 부잣집 미운 며느리를 잡아먹거나, 가난한 집에 멧돼지를 물어다 주는 것만큼 재미는 없었다. 그랬지만 우리는 <박씨부인뎐>을 소곤소곤 들려주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만은 좋아했다.
그쯤이면 화로에 묻은 달걀은 충분히 익는다. 우리는 그 달걀 한쪽을 놓치지 않으려고 어머니 곁에 모여들었다. 한 쪽씩 얻어선 괜히 소금접시의 소금이나 듬뿍 찍어먹었다.
그렇게 시골의 긴 밤이 이슥해지면 다들 잠자리에 든다. 잠자리에 누워 불을 끄고 눈을 감으면 문틈으로 한데 외풍이 솰솰 들이친다. 그때를 대비해 무명 손수건을 이마에 얹거나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 쓴다. 그래도 잠이 안 온다. 이쯤이면 몰래 숨어들어오는 불청객이 있다. 요란한 철새소리다. 집 가까이에는 경포호수가 있다. 해마다 초겨울이면 북쪽에서 철새들이 날아온다. 고니, 기러기, 청둥오리, 그리고 덩치가 작은 겨울 물떼새들이다. 밭에서 김장무를 뽑다가 보면 하늘 가득히 이들이 떼지어 온다. 이들은 장갑차 군단의 캐터필러 소리를 내며 점령군들처럼 하늘을 차지하며 몰려온다. 그들이 호수에 내려앉으면 그 넓은 호수가 비좁다. 철새들도 냉냉한 이국의 겨울밤이 춥겠지. 웍웍웍웍! 괙괙괙괙! 꺽꺽꺽꺽! 울어쌓는다. 이 외로운 철새울음이 창호지 종이문을 통해 방으로 가득히 밀려들어오면 잠이 쉬이 안 온다.
함께 자는 어린 조카도 잠이 안 오겠지. 더듬더듬 일어나 요강에 오줌을 눈다. 또로로로, 오좀 누는 소리가 철새소리를 가로막는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잠의 유혹에 빠진다.
그런 날 밤이 가고, 이튿날 아침 잠결에 마당에서 눈가래질하는 소리를 듣는다. 눈가래질 소리에 이불을 밀치고 벌떡 일어나 문을 연다. 아! 뜻밖에도 마당 가득히 흰눈이 내렸다. 눈은 소리 없이 내려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낳았다. 짚가리며, 담장이며, 마당에 놓인 우차며, 미처 들여놓지 못한 괭이며, 벗어놓은 장화가 눈에 덮혀 불룩불룩 제 모습대로 솟아나 있다. 아버지가 일찍 일어나셔서 추녀 밑의 눈을 치고 계셨다.
다른 날 아침은 게을러도 눈 내린 날 아침은 다르다. 뒤란 장독대로 가는 길을 내고, 우물터로 가는 길을 내고, 변소로 가는 길을 낸다. 그것도 모자라 건너 마을로 가는 눈길도 낸다. 눈가래는 언제나 우리들보다 크고 무거웠지만 부지런하다. 눈위에서 반짝이는 눈부신 식전 햇빛과 눈이 부셔서 눈을 반쯤 뜨고 눈을 치다가 허리를 펴고 굴뚝을 본다. 고물고물 굴뚝 위로 오르는 아침밥 뜸들이는 푸르고 맑은 연기가 아름답다.
아침 먹을 시간이 좀 이른가 보다. 밥 먹으라는 말이 없다.
우리들은 마당에 내린 눈을 모아 담장 곁에 쌓아올린다. 농촌의 마당은 넓다. 그 많은 눈을 한 군데로 모으면 지붕보다 높다. 쌓아놓은 눈더미에 삽으로 구멍을 내고 들락이며 놀고 있을 때다.
경포대역으로 가는 증기기관차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온다. 집마당에서 내다보면 200미터쯤에 강릉 ⁃ 경포대간 동해북부선이 있다. 그 철로 위로 힘차게 달려오는 미카 25. 우리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든다. 기차가 짧게 기적을 울린다. 기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린다. 그 덜컹거리는 바퀴소리 뒤로 40여년의 세월이 사라지고, 2012년의 마지막 12월만 아련히 남는다.
겨울이 오면 어린 우리의 희망과 같던 증기기관차가 보고 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리운 그때의 그 동해북부선 철길도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도심에 발을 대고 사는 한 그때의 추억을 이제 어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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