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아름다운 추억, 폭설

권영상 2012. 12. 4. 08:49

 

아름다운 추억, 폭설

권영상

 

 

 

 

 

1월 4일. 아침 8시.

전철에서 내렸는데도 눈은 여전하다. 나는 지금 출근을 위해 폭설 속을 걷는다. 10여분을 걸어 느티나무 교목숲 사이를 지나면 그 끝에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새벽부터 내린 눈은 벌써 15센티미터를 넘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눌러쓰고 길을 걷는다. 버스정류장에 다라랐다. 아무도 버스를 기다리는 이가 없다. 한참이나 기다렸건만, 버스는 오지 않는다.

 

고가도로 밑에 서 있는 커다란 녹색 도로표지판. '여의도', '충정로', '서대문로', '광화문' 글씨가 눈의 손바닥에 조금씩 가려진다. 그 아래로 길 건너편 마을의 하얗게 눈을 쓰고 있는 가게들과, 길옆 연필소묘화처럼 서 있는 플라타너스 가로수들. 그리고 즐비한 가게들 앞에 수북수북 쌓여있는 눈더미와 가끔씩 보이는 색깔있는 옷을 입은 아이들.....

수북히 쌓인 눈 위로 동네 사내 폴 뉴먼이 저벅저벅 지나간다. 뉴욕 북부 눈 내린 노스바스의 길거리로. 별 직업도 없이 날품팔이 막노동을 하며 사는 그는 중학교 시절, 저를 가르쳐준 선생님 집에 얹혀사는 늙은 사나이다. 그가 굵게 떨어지는 눈발 사이로 손을 내밀며 안녕! 내게 손을 흔든다.

나도 안녕! 답례를 한다.

 

버스가 여의도 방향으로 급커브를 틀 때 지나가는 길 건너 그쪽 마을.

카톨릭 성당이 있고, 마라톤 선수를 위해 지어진 체육공원과 잘 알려진 음악출판사, 조그마한 철물가게와 꽃살문 장인의 문가게와 자장면 집이 있다. 점집 곁 두어 평 되는 가게에서 아가씨가 꽃을 파는 꽃가게. 그 마을 골목에서 걸어나오는 늙은 제시카 탠디 할머니에게 사랑 이야기를 속살대는 셀리 역의 폴 뉴먼이 으쓱, 어깨를 올린다.

나는 화답하듯 눈 쌓인 우산을 접었다 폈다. 깎아놓은 양털처럼 우산 위에서 눈이 쏟아져 내린다. 아니 그 바람에 저쪽 전깃줄 위에 쌓인 눈도, 나뭇가지에 쌓인 눈도 합창을 하듯 후두두두 쏟아진다. 눈 내린 도회는 환상적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신비하고 몽환적인 데가 있다.

 

 

눈은 그치지 않는다.

소년 같은 생각이라고 하겠지만 아니다. 나는 어렸을 적, 눈의 정령에 홀려 산을 타고, 벼랑을 날아 내리고, 능성이와 능성이를 건너 뛰었다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컸다. 배고픈 집 아무개는 눈에 홀려 이 세상에 없는 대궐 같은 집에 들어가 배불리 밥을 얻어 먹고 돌아 왔다는 이야기도 했다, 우리 동네 나이 육십인, 일없이 놀고 먹는 양곰은 어느 겨울, 눈에 홀려 산속을 헤매다가 쓰러졌는데 문득 깨어 보니 돌부처가 그를 업고 집까지 왔더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그런 신비한 기억을 더듬으며 눈이 기막히게 내리는 길을 건넌다. 더 이상 버스를 기다리는 게 의미없다. 발목 위로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쳐 ‘노스바스의 추억’ 속으로 걸어든다. 나트막한 가게 앞에 사람들이 나와 눈을 친다.

“안녕하세요?”

그중 한길 높이로 눈을 치는 사내가 내게 인사를 한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안녕하세요?’ 답례를 했다. 그 곁에 선 빨간 털장갑에 빵모자를 쓴 40대 남자가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보기 좋은 눈입니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인사를 받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가 내게 당돌하게도 그런 인사를 한다. 그러고 보니 신정이 지난 지 사흘 됐다. 신정 인사가 서로 낯설기만한 이 낯선 장소에서 갑작스런 신정 인사를 받는다. 나도 새해 인사를 하며 길을 걸어 올라갔다. 폭설 탓인지 이 낯선 사람들이 도무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정답다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도 마치 오랫동안 사귄 사람의 정깊은 말처럼 내 마음을 녹여준다.

“안녕하세요?”

 

 

언덕배기 남자들은 삽과 빗자루를 들고 나와 눈을 친다. 나는 새해 인사겸,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한다. 그들도 어색해 하지 않게 내 인사를 받는다. 술이라도 한잔 나누고 싶은 아침이다. 내가 다니는 직장이 사립학교라 벌써 십여 년을 같은 길로 다닌다. 이런 삶의 무료함을 겨울눈이 달래 준다. 나는 좀 설렌다. 길 위로, 또는 지붕 위로, 그득그득 차오르는 적설은 괜히 감정을 북받치게 한다. 마치 샘물이 차오를 때 느끼던 그 새로움 같은.

 

희망없는 인생을 산다고 나는 가끔 셀리처럼 불평을 했다. 그러나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별날 것도 없는, 내세울 것도 없는 그런 평범한 그 삶이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때로는 감동적일 수도 있다는 걸 오늘 느낀다. 나이 들어서야 평범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노스바스의’ 아련한 추억이 괜스리 그립다.

 

언덕길을 걸어, 승현약국 앞을 지나, 박리김밥가게를 지나, 치과를 지나면 학교 앞이다. 미끌어지는 길을 걸어 허덕이며 왔다. 눈도 그친다. 우산을 접고, 장갑낀 손으로 머리의 눈을 턴다. 눈이 날아오른다. 가게 지붕위의 하늘이 파랗고 깊다.

“나이 먹는 것도 아름다운 거에요.”

눈길을 걸어오는 날 보고 누가 말을 건넨다.

교문 앞 문방구 아주머니다. 다져진 길위에서 썰매를 탄다. 길을 멈추고 서서 그 모습을 본다. 중년의 나이에도 저럴 수 있는 건 아름답게 먹은 나이 때문이다.

"안녕!"

폴뉴먼이 저쪽 골목길로 사라진다.

아름다운 추억. 1월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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