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그 형님

권영상 2012. 12. 3. 15:31

 

그 형님

 권영상

 

 

 

 

 

 

가까이 지내는 형님이 한분 계신다. 나이 일흔일곱이다. 나와 무려 17년 차이가 나긴 해도 촌수로 형님 뻘이다. 그분 고향이 주문진이다. 70년대만 해도 주문진 항구에서 잘 나가는 선주의 아들이셨다. 주로 부산에서 생필품을 화물선에 싣고 와 공급했다. 또 하나의 화물선엔 무연탄을 선적해 와 주문진에 하역했다. 그러던 만 톤급 화물선 두 척이 운항 중에 침몰했다. 그 바람에 선박 사업을 접고 그 여력으로 서울에 올라와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돈 있는 집, 세상 물정 모르는 맏아들의 사업이 그리 오래 못 갈 건 뻔했다. 그 후 형님은 모 그룹의 건설현장을 돌며 현장사업소 일을 했다. 주로 건설현장과 건설자재를 관리했다. 그러느라 일 년의 팔 할을 노지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살았다.

그러는 중에도 형님의 아들은 잘 알려진 공대를 졸업했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다시 사업체를 차렸다. 사업장은 당시 기대를 안고 신축한 용산전자상가 건물이었다. 거기에서 컴퓨터와 컴퓨터 관련된 부품을 취급했다. 이들이 대학, 컴퓨터공학과 1기였다. 컴퓨터 산업이 한창 붐을 탈 때였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전자시장으로 몰렸고,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이들은 컴퓨터 관련 사업에 뛰어들었다.

 

 

형님의 아들, 그러니까 내 조카뻘 되는 이도 이 사업에 몸을 던졌다. 그는 대학 시절에도 농구에 일가견이 있었다. 아마추어 대학 농구팀에서 활약을 했었다. 그럴 정도로 그에겐 친구가 많았다. 80년대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업이란 게 인맥없이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니 그가 시작한 사업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이었다. 가게 하나를 두 개 면적으로 넓히고, 투자도 많이 했다. 그렇게 자금투자도 하고 사업장도 막 넓혀갈 때, 불행이 덮쳤다. IMF가 닥쳤다. 전국의 사업체들이 추풍낙엽처럼 맥없이 주저앉았다. 물론 투자를 아끼지 않은 조카의 사업장도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IMF가 언제인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일이다.

회사들은 문을 닫고, 가장들은 실직 상태로 길거리에 나서고, 가정이 파탄나고 자살자가 속출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대환란이었다. 빚은 갚을 길 없어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빚으로부터 그나마 자신이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법률상 이혼을 하고, 전국을 떠돌거나 해외로 도피, 또는 불법이민을 한 이들도 생겼다.

그때 조카도 2억 가까운 부채를 안고 쓰러졌다. 대부분이 안면 있는 이들로부터 빌린 돈이었다. 돈을 빌려준 이들이 빚독촉을 했다. 그러나 상환해줄 여력이 없었다. 남들 모두 나라의 불찰이라고 나라에 책임을 돌리며 버티었다.

 

“세상에 아깝지 않은 돈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형님만은 달랐다. 돈 빌린 집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빌린 액수만큼 몸으로 갚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형님 나이 50대 후반. 형님은 아들을 설득하여 돈을 빌려준 이들의 공장이면 공장, 회사면 회사, 공사현장이면 공사현장을 3년, 또는 5년씩 매일 새벽같이 나가 노동으로 빚을 갚아나갔다. 그러고 최소 생계비를 받아왔다. 그 생활을 15년째 하고 있다. 이제 형님에겐 남은 게 아무 것도 없다. 조카마저 마흔 다섯 살의 나이를 넘겼다.

 

“미칫소! 그냥 말고 때우면 될낀데.”

아는 사람은 말 부조를 한답시고 그랬다.

“우리가 자빠지면 그 집 피 같은 돈은 어떻게 되나?”

형님은 그 집 사정을 먼저 생각했다.

내 돈 100원이 아까운 줄 알면 남의 돈 100원도 아깝다는 게 형님의 논리다. 그냥 말로 하는 허공논리가 아니라 체험으로 하는 말이다. 어찌 보면 초등학생 논리다.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한 논리다. 남들은 다 길거리를 헤매고, 나라에 떠넘기고, 법정을 들락이고, 그러며 흐지부지 하고 마는데 형님은 바보처럼 원칙에 매달렸다.

 

 

 

“언제까지 마지막 인생을 자식 빚 갚다 말 거에요. 젊은 놈은 장가도 못 가고.”

그 말도 옳다.

그 말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 형님이 놀랍다는 거다.

“자식 욕하지 마라. 애 덕에 이렇게 운동한다. 그러잖음 이 나이에 방구석에 박혀 텔레비밖에 더 보겠냐!”

형님은 공장 일로 생긴 팔 근육을 보여주신다.

형님은 환갑도 칠순도 없이 저렇게 아침 8시에 나가 밤 9시에 돌아오신다. 일이 고되어 양말은 사흘을 못 신어 떨어지고, 신발은 이틀에 한 번씩 빨고, 팬티는 두어 번 입으면 구멍이 난단다. 그렇게 험한 일을 하면서도 형님은 웃으신다.

 

“뭐가 좋아 웃음이 나올까?”

가까운 이들이 그러면

“남의 큰돈을 이 늙은 힘으로도 갚아나갈 수 있다는 게 즐겁지 왜 안 즐거운가?”

어찌 보면 달관한 이의 웃음이다.

빚투성이 못난 자식 버리고 나가살면 그만이지. 혹 그런 마음 안 가져보셨냐고 물으면 고개를 흔든다.

“추호도 해 본 적이 없네.”

젊은 시절, 돈 많은 집 맏아들로 살아올 때 형님은 돈에 대한 도의적 생각을 많이 하신 것 같다. 돈이 노동의 댓가며, 돈이 땀의 댓가이며, 돈이 그 사람의 권세만이 아니라 인격임도 아신 것 같다.

가끔 밤에 약주라도 한 잔 대접해 드리려고 전화를 걸어본다. 아직 퇴근을 못하고 있다는 대답을 듣는다. 시계를 본다. 8시가 넘었다.

“술 먹으면 다음 날 일에 지장이 있어.”

그러며 형님은 전화를 끊으신다.

이왕 하는 일, 돈 빌릴 때 마음처럼 간절히 잘 해 드려야 하지 않겠냐는 거다.

 

 

 

이제는 그 빚, 15년이나 지났으니 아주 잊고 말아도 될 것 같은데 아니다. 말끔히 빚을 갚고 인생을 마치실 모양이다.

사람의 숨겨진 순수성이 이런 비극적 상황을 통해 되살아남을 본다. 우리가 대충대충 살고, 다시 또 흥청흥청 사는 동안에도, 반짝이는 순수성을 밝히는 그 형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