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측간은 멀수록 좋다

권영상 2012. 9. 21. 11:10

 

측간은 멀수록 좋다

권영상

 

 

 

 

처갓집과 측간은 멀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옛말 중에 그른 말 있을까? 요즘 우리나라도 장모의 횡포에 사위들의 고민이 깊어간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측간도 당연히 멀수록 좋다. 예전의 측간 배치를 보면 안사람들이 쓰는 뒷간은 바로 부엌문 뒤다. 디딜방아가 있는 집이라면 디딜방앗간 곁에다 배치한다. 바깥사람들이 쓰는 뒷간은 사랑채와 가급적 먼 곳에다 두었다. 때로는 집 바깥에다 두기도 했다.

 

큰댁에 제사를 보러 가서 겪는 큰 어려움은 측간 문제다. 측간에 가려면 마당가 목백일홍 숲을 지나 대문없는 대문을 나와야 한다. 문밖에 나오면 벽오동나무와 상수리나무 서너 그루가 서 있는데 그 밑을 지나야 한다. 그러고도 열서너 걸음 더 가면 가죽나무 두어 그루 서 있는 어린 소나무숲에 측간이 있다.

아래쪽은 붉은 흙벽이고, 윗부분은 목재를 써서 통풍을 살렸다. 가죽나무를 빙 돌아난 인적이 없는 편에 출입구가 있다. 여기서 알아둘 일은 암만 뒤가 급해도 측간에 성큼 들어가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살을 맞는다. 살을 맞으면 그길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측간엔 무서운 측간귀신이 있기 때문이다. 측간 귀신은 온갖 악행을 일삼다 죽었다. 죽어도 제 명에 죽은 게 아니라 제 머릿채에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런 뒤에 측간귀신이 되었는데 이 자는 죽어서도 측간에 앉아 저의 답답한 머리칼을 세고 있다. 성품이 별나다. 놀라게 하면 덤벼들어 신벌을 내린다. 그러니 그를 깜짝 놀라게 해선 안 될 일이다.

 

“으흠! 큼! 으흠!”

그렇게 서너 번 헛기침을 해서 자리를 좀 비켜달다는 양해를 구해야 한다.

그러고 들어가 허리를 풀고, 또 두어번의 헛기침을 다시 하며 주저앉는다. 처음엔 측간신이 등 뒤에서 굵은 손으로 덮칠 것 같아 두렵다. 온통 눈길이 등 뒤로 간다. 괜히 여길 왔다며 자책한다. 그렇다고 안사람들이 쓰는 뒷간에 갈 수는 없다. 그건 아주 ‘망측한’ 일이다. 사내가 여자들이 쓰는 뒷간을 들락거린다는 건 안 될 일 중의 안 될 일이다.

 

 

뒷일을 보며 천천히 두려움을 푼다. 잠시 잠깐이면 사람을 안심시키러 오는 분이 있다. 어느새 어린 솔숲 사이로 찾아온 달빛이다. 달빛은 반듯이 쪼그려 앉은 내 무릎밑까지 달려온다. 푸른 달빛을 앞에 놓고 앉아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쓰쓰쓰쓰쓰, 측간 밖 어둠에서 풀벌레 고요히 우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일을 마치고 측간을 나온다.

잘 보고 나오면서도 속으로 중얼거린다.

“왜 이렇게 먼 데다 지어놨지?”

 

나중에야 안 거지만 성주신이나 삼신, 조왕신은 모두 가정의 번창과 액운을 막아주는 길한 신들이다. 그러나 측간신은 사람을 괴롭히는 못된 신이다. 그래서 집밖으로 쫓겨난 셈이다. 고향집도 바깥 남자들이 쓰는 측간은 집 밖은 아니어도 사랑방에서 떨어져 있다. 어머니나 누이들이 쓰는 측간은 남자들이 쓰는 뒷간과 분명히 구분 되어 서쪽 정지문밖에 있었다.

 

 

근데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다.

나는 학비를 충당할 셈으로 시내에 있는 친척 누님댁에서 입주 과외를 했었다. 그 시절 내게 가장 큰 고민을 안겨준 게 바로 이 화장실이다. 그때의 누님댁의 화장실은 수세식이었는데 2층에 따로이 두고 안팎이 함께 썼다. 안사람과 바깥사람이 쓰는 뒷간을 따로이 써 온 내게 있어 이 공용 수세식 변기는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누님이 앉으셨던 자리에 내가 또 앉는다는 게 도저히 마음 내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혹 볼일이 있으면 집을 나가 시장통 입구에 있는 먼 공중화장실을 썼다.

 

어느 날 저녁, 그 날도 공중화장실을 쓰고 돌아나오는데 내게 글을 배우는 계집아이가 나를 불렀다.

왜 여기에 와 있느냐고 내가 그 녀석에게 물었다.

“밤마다 어딜 나가시는지 궁금해 따라 나왔어요.”

중학교 3학년 계집아이가 웃으며 그랬다. 내 행방을 다 알았다는 듯이.

내가 왜 웃느냐고 물었다.

“왜 화장실을 집에 두고 여길 오세요?”

그 녀석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남녀유별이라.....”

나는 거기서 그 말을 불쑥 했다.

해놓고 보니 거기에 참 어울리는 말 같았다.

남녀가 일을 보아야할 곳이 아무래도 따로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촌놈이고 좀 보수적이라 그럴까. 나는 지금도 그런 생각이다. 아내와 딸아이가 보아야할 변기가 따로 있고, 내가 보아야할 것이 따로 있어야 하는데,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전의 어머니 말씀대로 그 일이 ‘망측한’ 일이 된다.

 

 

나중에 넉넉한 땅을 얻어 집을 짓는다면 바깥 측간만은 집과 거리를 두게 하고 싶다. 서너 걸음이면 화장실에 들어가 뒤를 보는 그 민망스런 서양식 건물 구조가 싫다. 마당을 나와 좀 걸어가는 거리, 일이 다급해도 좀 참아내 보는 거리, 그런 일로 바깥 공기를 좀 쐬어보는 거리,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 몇 번인가의 헛기침을 해 보는 거리.....

매화틀에 앉아 달빛을 맞이하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시상을 꼬누는 그런 측간. 그러고 나올 때는 마당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아 달을 보거나 휙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 일, 마당 하늘로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밤새의 다급한 날개짓 소리를 듣는 그런 거리의 화장실을 갖고 싶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눈 똥을 소중히 모아 잘 삭혀서는 고추밭이나 고구마, 감자밭에 넣어 땅을 살찌우게 하는 일, 똥 오줌 한 움큼 치우려고 귀한 물 13리터를 낭비하는 악습에서 벗어나려는 일......

그 일이 좀 먼 측간에 가는, 단 한번의 일로 이루어진다.

왜 좋지 아니한가.

나쁜 성질을 가진 신이긴 해도 우리네 화장실에 측간신을 두는 것도 좋지, 싶다. 그가 무서워서라도 물을 적게 쓰고, 그가 무서워서라도 성급함에서 좀 벗어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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