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외등

권영상 2012. 9. 20. 10:20

 

외등

권영상

 

 

 

 

여름 방학 중의 금요일이다. 성장동화 <둥글이 누나>가 출판된 직후다. 고향 작가가 쓴 글이니까 초대하고 싶다는 전화가 고향의 모초등학교에서 걸려왔다. 방학 중에 고향을 한 번씩 다녀와야 하니까 겸사겸사 가겠다는 대답을 해놓았다. 나는 하루 전인 목요일 오후에 승용차로 출발했다. 횡성휴게소 쯤에서 고향 집에 전화를 했다.

“저녁에 들를 거네.”

내 전화를 장조카가 받았다.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장조카가 새로 집을 지어 고향을 지키고 있다.

강릉의 안목 해안가에서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를 만나 묵은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다가 그만 저녁까지 먹게 되었다.

 

그러고는 좀 늦은 시각에 초당 집을 찾았다. 집은 솔숲 언덕길을 빠져나오면 보인다. 펀한 들판 끝에 있다. 나는 들길로 차를 몰고 들어섰다. 저쯤에 환한 불빛이 보인다. 고향집의 외등 불빛이다. 집 앞에 서 있는 감나무 사이로 후연한 불빛이 이쪽으로 날아온다. 순간, 예전 아버지가 켜 두시던 외등이 떠올랐다. 나는 길 한켠에 차를 세우고 전조등을 껐다. 그리고 차에서 내렸다. 환하던 사위가 그 옛날의 밤처럼 어둠 속에 묻혔다. 희뿜하던 외등 불빛만이 오롯이 빛나고 있다. 비록 좀 먼 거리이긴 해도 불빛 주위를 날고 있는 불나방들의 재빠른 모습도 보였다.

조카 내외가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계를 봤다. 10시가 조금 넘었다. 아이들 학비를 대랴, 생활비를 벌랴, 이런저런 일에 농사까지 지어야하는 조카에게 있어 여름밤 10시는 이슥하고 고단한 시간이다.

 

 

 

 

외등불빛을 보니 옛날 일이 새삼스럽다.

누님들의 결혼예식이 있기 전날 밤이면 먼데서 오시는 친척분들을 기다리느라 아버지는 외등을 오래도록 켜 놓으셨다. 그때의 집은 지금 집과 달리 아버지께서 분가해 나오실 때 지은 여덟 칸 초가집이었다. 그 집엔 아버지가 주무시는 사랑방 앞 처마에 외등이 하나 있었다. 사랑방 전기를 따다 처마 끝에 묶어놓은 등이었다. 밤 9시가 넘으면 전기료가 아까워 불 꺼라, 꺼라, 하시는 아버지도 그런 날만큼은 밤이 이슥하도록 켜셨다.

안에선 이웃 어른들이 오셔서 초례상에 놓을 밤을 치시고, 과질과 떡과 붉은 물을 들인 과자와 떡을 괴느라 사람들 목소리가 왁자했다. 그럴 때에도 마당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 얼른 문을 열어보면 먼데 계신 당숙이나 고모들이 와 서 계셨다. 그들 모두 윗마을까지 비추는 외등의 불빛을 보고 찾아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시절 외등의 불빛 끝엔 언제나 축제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아는 또 하나의 외등에 대한 기억은 좀 애잔하다.

제일 큰 형님과 막내인 나는 나이 차이만도 20년이 넘는다. 지금 고향을 지키는 장조카가 나보다 한 살 아래이니 큰형님은 내게 아버지뻘이나 다름없었다. 그 형님은 형수를 잃고부터 투전에 손을 댔다. 형님은 그 일로 알게 모르게 빚이 많았고, 끝내 전답문서를 몰래 빼돌려 투전판에 날리고는 집을 나갔다. 내가 알기로 형님은 일 년이 다 가도록 집 밖을 떠돌았다. 차마 집으로 돌아오기가 민망했던 거다.

 

그때, 나는 아버지와 장지문 하나 사이로 사랑방과 뒷사랑방에서 지냈다. 그때에도 밤 9시만 되면 아버지는 안방마루에 나가 안방을 향해 헛기침을 하셨다. 불을 끄라는 신호였다. 그러고 사랑방으로 들어오셔서 어흠, 하시고는 두 손을 들어올려 전깃불을 끄셨다. 아버지가 어흠, 하신 건 장지문 하나 사이로 있는 내게 보내는 신호셨다. 얼른 공부를 마치라는.

아버지가 그러고 누우실 때에도 장지문 사이로 사랑방을 보면 외등불빛이 창호지문에 비치었다. 나는 아버지가 주무실 때쯤을 기다려 마루로 나간다. 살금살금 마루를 걸어가 외등을 끌라치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짧게 들렸다.

“놔 둬라.”

아버지는 주무시지 않고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다. 그가 집을 나간 아버지의 큰아들이자 나의 형님이었다. 투전판에 땅을 날리고 집을 나간 마흔이 넘은 자식을 아버지는 그렇게 기다리고 계셨던 거다.

 

 

외등을 끈다고 집을 못 찾아올 형님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그게 아니셨다. 아버지에게 있어 그 외등은 내가 지금 너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표시가 아니었을까 한다. 형님은 아버지가 부끄럽고, 또 한집 뒤에 사시는 큰댁과 작은댁이 부끄러워 못 들어오신다는 걸 아버지도 짐작하실 테다. 그러니 외등을 두신다는 건 어서 돌아오라는 형님에 대한 신호이면서 동시에 큰댁과 작은댁에 대한 아버지의 속마음이기도 하셨을 거다. 자식이 밉긴 해도 받아들여야 하는게 부모 마음 아닌가요, 라는.

그 무렵, 아버지는 그렇게 이슥하도록 외등을 켜셨다.

 

 

어찌되었건 아침에 나와 보면 분명 외등을 꺼져 있었다. 사랑방 앞 처마 밑까지 나와 이슥한 밤에 불을 끌 사람은 아버지와 나 외에는 없었다.

배운 것이 없어, 배운 아들을 설득할 힘이 없는 아버지는 그런 방식으로 자식을 대하셨다. 직접 마주 앉아 대화를 하시는 게 아니라 두 분 사이에 외등이라는 것을 두고 말없이 속뜻을 전하셨던 거다.

그때 나는,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가 그런 물음에 시달렸다.

아버지란 묵묵한 세월 같은 분, 난해한 시집처럼 읽고 또 읽어도 그 의미를 이해할 시간이 더 필요한 분이 아버지가 아니실까 했다.

그 후, 오랜 뒤 형님은 객지를 떠돌다가 상한 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형님은 여전히 손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였다. 아버지 떠나시고, 일흔을 넘긴 뒤 형님은 그만 저쪽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나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전조등을 켰다.

천천히 차를 몰아 고향집 마당에 세우려니 누가 안에서 문을 연다.

아직도 자지 않고 두 내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거실에 들어서며 보니 밥보자기 덮인 상이 거실 귀퉁이에 있다.

“삼춘 오면 술이라도 같이 한잔 하려고 기다렸지.”

장조카가 잠깐 눈을 붙였던지 눈을 부비며 술상을 들어 옮겼다.

술을 따라 한잔을 마시는데 조카가 제 아내에게 곁눈질을 한다.

“이제 외등 끄지 뭐.”

조카며느리가 일어나 현관의 스위치를 내린다.

내 기억속의 먼 외등 꺼지는 소리도 딸깍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