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내 앞으로 개미가 기어온다

권영상 2012. 9. 19. 09:51

 

내 앞으로 개미가 기어온다

권영상

 

 

 

일주일만 좀 게을러지면 우편물이 책상 위에 가득히 쌓인다. 보내온 책들을 열어보고, 감사의 답장을 해줄 건 일일이 해준다. 그러고는 책상에서 일어나 방청소를 한다. 잘 닦인 방바닥에 앉는다. 편하게 앉아 한번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책을 꺼내어 읽는다. 허리를 굽혀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가는 머릿속에 오만가지 잡념이 인다. 하루만 책을 읽지 않아도 머리가 묵정밭처럼 헝클어진다. 눈은 책에 가 있으나 머릿속은 책과는 먼 세상을 홀로 떠돈다. 간신히 잡념을 잡는다. 책이라도 읽어야 먹고 살지, 하는 오래된 악습으로 한 줄 한 줄 마음을 다잡아 읽어 나간다.

 

그럴 때에 내 책 곁으로 개미 한 마리가 기어온다. 사방을 둘러본다. 벽에 기대어 쌓아놓은 책 사이 어디에서 기어나온 모양이다. 베란다에선 간혹 화분들 사이로 몇 마리씩 줄을 지어 오고가는 걸 보았다. 근데 여기는 베란다와 먼 구석진 내 방이다. 볼볼볼볼 기어오던 개미가 내가 펴놓은 책에 머리를 부딪는다. 흥미를 느꼈는지 책 위로 올라오더니 슬그머니 내려간다. 개미라고 책 읽기가 좋을까. 홀로 방바닥을 기어간다.

 

방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어디서 온 녀석인지

개미 한 마리

내 책 곁을 홀로 지나간다.

 

한적한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그때에 불쑥 이런 ‘개미’라는 동시를 나는 쓰고 말았다.

기어가던 개미가 가고 있는 방향에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방향을 바꾸어 다른 곳을 향한다. 개미가 빈 방안을 홀로 기어가는 걸 보자니, 그의 형편이 가없는 세상을 가고 있는 나와 비슷하다. 이 천지간에 어찌어찌 태어나 나도 여기까지 왔다. 생각해 보면 꽤 많은 나이를 살면서 멀리도 왔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돌아간다 해도 내가 처음 떠나온 그 곳을 알지 못할 만큼 멀리 왔다. 나는 어디를 향하여 살고 있는 걸까. 내가 가고 있는 오늘 그 너머의 길을 모르겠다. 여기까지 오긴 잘 온 걸까. 내가 원했던 그길이 아닌 틀린 길을 걸어온 건 아닐까. 개미도 나처럼 지금 길 한가운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반갑다.

개미가 다시 내 쪽으로 온다.

 

개미는 어쩌라고, 제 무리를 버리고 홀로 이 빈방까지 왔을까. 어디서 무얼하다가 아파트 4층인 이곳까지 왔을까. 개미가 가엾어진다. 개미란 놈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저의 의지대로 태어나 저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여왕개미의 전제적 힘에 의해 일평생 일만 한다. 여왕개미는 권력을 틀어쥐기 위해 자신이 거느리는 개미들에게 페로몬을 분비한다. 계급분화 페로몬을 강하게 분비하면 개미들은 그것에 중독되어 저항하지 못하고 일평생 노예로 복종하며 산다고 한다. 노예의 삶을 살면서도 그들은 그들이 노예인 줄 모른다. 그게 당연한 인생이라 생각하며 산다는 거다.

 

“가엾다.”

나는 개미의 인생을 이해해 본다.

여왕의 강한 페로몬 분비로 개미들은 언감생심 빈둥빈둥 빈둥거리거나 혼자 산책할 수 없다. 오직 일 하나에 매달려 땀 흘리며 산다. 그 길이 개미의 인생이다. 아니, 그게 행복이라 믿으며 개미는 살아간다. 그렇게 살다가 병들면 버림받는 게 또한 개미들이다.

 

개미의 세상만 그러한가. 아니다.

우리도 그런 세상을 살아왔다. 앞서간 선배들로부터, 스승으로부터, 부모로부터, 페로몬의 세례를 받으며 자라왔다. 이름하며 ‘근면, 성실’ 페로몬! 온갖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그들은 끊임없이 ‘근면과 성실’을 중독시켜왔다.

우리가 이 중독 프로그램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들은 훈계와 벌로 가차없이 우리를 그쪽 방향으로 몰아갔다. 지금 여기 이 방에, 그 옛날의 나처럼 방황하는 한 생명이 있다. 내 눈앞에 기어가는 개미다. 그도 어쩌면 일이라는 중독의 길에서 벗어나려 지금 방황하고 있는지 모른다. 노는 일을 배우고, 유유자적을 배우고 있는지 모른다.

 

 

개미들은 살아오며 노는 일을 얼마나 죄악시하였나? 할 일없이 빈둥거리는 자들를 얼마나 멸시하였나? 아침이 되면 문을 열고 먼 길로 나가 밥을 벌어오고, 밤이면 늦도록 집안일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들에게 꿈이 있었던가. 자신을 위해 휴식 한번 준 적이 있었던가. 그들은 종족번식의 꿈조차 가질 수 없도록 거세되었다.

“하루를 살더라도 나는 내 방식대로 살 거야!”

지금 이 개미의 머릿속에 그런 야무진 꿈이 있을지 모른다.

 

내 앞쪽으로 기어오던 개미가 방향을 바꾸어 책 쪽으로 간다. 얼른 책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나도 뒤로 물러앉는다. 개미가 가는 이 유유자적의 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이 개미야말로 어쩌면 강한 페로몬의 중독에서 벗어난 가장 의식이 명료한 녀석일지 모른다. 나 또한 ‘근면 성실’의 페로몬에서 이제는 벗어나 명료해지고 싶다.

나도 좀 놀고, 나도 좀 빈둥거리고, 출근을 하다말고 길을 벗어나 멀리 부산이나 변산반도를 향해 달려가고 싶다. 차창이 터져라 꽝꽝 음악을 틀어놓고, 바락바락 소리쳐 노래를 부르며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싶다. 그러면서 천천히 나를 찾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