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디&카트보 '타워맨'
어머니 마음이 담긴 디자인
-문화역서울 284 ‘인생 사용법’ 디자인전을 보고-
권영상
겸상, 참 정겨운 말이다.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단 둘이 밥을 먹는 일. 겸상을 한다는 건 밥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두 사람이 공유한다는 뜻이다. 공유하는 이면에는 서로를 배려하는 역학이 숨어있다. 겸상엔 함께 호흡하고, 함께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 좀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겸상밥을 먹었다. 내가 앉은 맞은 편엔 늘 아버지가 계셨다. 손 위 누이가 셋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막내자식이다 보니, 그런 특별한 자리에 내가 앉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마흔에 낳으셨으니 아버지와 나의 나이 차이는 마흔이다. 어머니와 누이들은 주로 둥그런 두렁반에서 식사를 하였고, 나와 아버지는 따로 아랫목에서 겸상을 받았다.
시골 농가의 밥상이란 한결 같다. 밥과 국, 종지에 담긴 고추장, 김치와 깎두기 등의 채소반찬과 가끔 오르는 된장찌개가 전부다.
그러나 때로 생선반찬도 올라온다.
우리가 사는 이웃 동네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고기잡이를 나갔다온 배가 들어오면 급한 대로 그들은 양식을 구하러 우리 동네에 생선을 이고 왔다. 그분들이 가고난 뒤면 어김없이 생선반찬이 올라왔다. 모처럼만의 이 귀한 생선반찬을 겸상의 어느 쪽에 놓을 것인가. 겸상을 차리시는 어머니에겐 그게 약간의 고민 아닌 고민이었을 것 같다. 아버지의 오른 쪽에 배치하면 아버지가 잡수시기 쉽다. 그러나 마주 앉은 내게는 불편한 위치다. 그런 고민 끝에 생선은 아버지의 오른쪽에 놓인다. 이러한 배치엔 어머니의 분명한 의도가 숨어있다. 이게 어머니가 꿈꾸는 아름다운 겸상의 디자인이다.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식사를 하러 안방에 들어오신다. 방에 앉아 겸상을 받는 순간, 아버지는 어머니가 놓으신 이 반찬그릇의 배치 의도를 모르실 리 없다. 아버지는 국 한 입 뜨시고 밥 한술 뜨신 뒤에 이 배치를 변형시킨다.
“고기 먹어라.”
그러시며 생선접시를 내가 먹기 쉽도록 내 오른쪽으로 이동시킨다. 거기엔 아버지가 나를 각별히 아끼신다는 뜻이 숨어있다. 그 모습을 두렁반에서 밥을 드시는 어머니가 슬그머니 보신다.
“옮기시긴 뭐하러......”
어머니가 그러신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만든 이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생각하셔서 생선반찬을 아버지의 오른쪽에 놓으셨고, 아버지는 자식인 나를 생각하셔서 다시 아버지의 왼쪽으로 생선반찬을 옮기셨다. 그건 어린 막내가 혹 생선 한 점 제대로 못 먹으면 어쩌나 하고 마음 쓰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생선 접시엔 이런 역학관계가 있다.
어렸을 때엔 그런 걸 몰랐다. 내가 먹고 싶을 걸 내가 먼저 먹었고, 투정도 부렸지만 열 살 스무 살, 철이 들어서부터 달랐다.
“고기를 먹어라.”
내가 나이를 먹었을 때도 가끔 생선반찬이 올라오면 아버지는 내가 먹기 좋도록 생선접시를 내 오른쪽에 옮겨놓으시곤 했다.
“네.”
하고 대답은 하지만 그 반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아버지가 먼저 떼지 않은 생선에 젓가락을 댄다는 게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또 나를 위해 절을 대지 않으셨다. 나는 연세가 많으신 아버지가 드셔야지 했고, 아버지는 힘쓰는 자식이 먹어야지, 하셨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반찬에 자꾸 손을 댔고, 아버지도 나를 위해 생선이 아닌 다른 반찬에 손을 대셨다.
나는 가급적 아버지를 위해 얼른 밥을 먹고 일어선다. 아버지 겸상 맡에 늦도록 붙어앉아 있는 게 도리가 아닌 듯 했다. 그래 얼른 일어나 내 방으로 나간다.
그러다 어느 때에 부엌에 들어가 겸상 내온 걸 본다.
거기 아버지와 함께 한 겸상위에 생선 한 도막이 그대로 있다. 끝내 잡수시지 않고 그대로 두신 이 생선은 또 누구를 염려해서일까. 생선 한 도막이 가족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돌고 돌아 다시 밥상을 차렸던 그 부엌으로 나온다.
이것을 보신 어머니는 또 마음이 안 좋으셨을 테다.
이후부터는 생선접시에 아버지도 드시고 나도 먹으라고 한 접시에 두 도막을 올리신다. 처음에는 그 두 도막 중 내가 한 도막을 먹었다. 내 몫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다 어느 때에 생각해 보니 아버지와 내가 반반의 몫을 공평하게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몫이라고 매정하게 한 도막을 집어 먹는 일이 자식으로서 못할 일이었다.
집안 형편이 조금씩 나아질 때가 되어서는 어머니가 겸상에 직접 관여하셨다.
“불 좋은 데다가 구웠다. 먹어봐라.”
어머니는 두렁반에서 식사를 하시다 말고 이쪽을 보고 그러셨다.
아, 겸상 생선접시에 생선이 세 도막 놓여있었다.
나는 이렇게 배치하여 놓으시고 내게 굳이 안 하던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 뜻을 안다. 아버지도 물론 아신다. 아버지께서 쉬이 한 도막을 잡수신다. 나도 쉽게 한 도막을 먹는다. 나는 밥을 다 먹고 일어나 내 방으로 나간다. 그때까지 남은 한도막이 그대로 생선접시에 있다. 그 도막은 누구를 위해 아버지가 남기시는 걸까. 두 누이를 먹이느라 생선 한쪽 못 먹고 있을 어머니를 위해 남기심을.......
11월 4일까지 문화역 서울 284 '인생사용법' 디자인전을 하고 있다. 지난 해에도 지지난 해에도 잠깐 들러보았다. 디자인전을 보고 나올 때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디자인의 도덕성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무심히 사용하는 자동차, 냉장고, 텔레비전과 같은 제품들. 이런 제품을 광고하는 디자이너들이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도덕성을 자꾸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디자인전의 부제 중 하나가 ‘우연한 공동체’다. 이 말이 나를 전시장으로 이끌었다. 디자인에 있어 우연성이란 의도성에 반하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 나뭇잎의 섬세한 모양이나 해바라기 꽃잎의 배치, 또는 물결무늬 등의 자연성을 그렇게 이른다. 디자인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방향이 그쪽이라 본다.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아미쉬 사람들처럼 소박하고도 경건한, 그러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 이르려는 비의도성. 무엇보다 그 바탕에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있는 디자인을 꿈꾸어 본다.
빅터 파파넥은 그의 저서 <인간을 위한 디자인>에서 모든 사람은 디자이너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의 우리 어머니들도 밥상을 차리실 때마다 반찬의 위치를 디자인한 디자이너셨다. 소박한 밥상이지만 밥상이라는 디자인 안에 가족공동체간의 역학관계를 염두에 두셨다. 그 바탕에 가족 건강에 대한 염려와 배려가 있었다. 그걸 보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얼마나 훌륭한 디자이너셨던가. 눈 뜨면 사방천지가 디자인의 넘쳐나는 산물들이다. 디자인을 생산하는 바탕에 어머니의 마음이 담길 수 있기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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