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국숫집 아줌마
권영상
나나 집사람이나 집 밖의 음식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웬만하면 집에서 먹는 소박한 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말농장에서 먹거리를 키워오면 아내는 그걸로 음식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래도 가끔 한 블록 건너에 있는 개성국숫집을 찾았다. 어렵게 갔는데 하필이면 휴업이다. 휴업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그냥 돌아오기가 뭣해 이 길 저 길, 발품을 팔아 찾아낸 곳이 또 국숫집이다.
보성 칼국수.
그 집 상호가 그랬다. 나는 고향이 강릉이다. 입맛이 다를 거라는 차이를 알면서도 국숫집이라는 이유로 성큼 들어섰다. 실내는 컸지만 사람이 없다. 우리는 첫눈에 마음씨 좋아 보이는, 얼굴이 불콰한 여주인에 반해 자리에 앉았다. 보리밥 조금과 열무김치가 먼저 나왔다. 고추장을 마침맞게 넣어 맛있게 먹는 우리를 보고 여주인이 다가왔다.
“고향이 보성인디, 엊그제 보성서 실어온 열무로 맹긴 거요. 고칫가루도 볕 좋은 보성 햇빛에 말린 기고, 꼬막도 보성 볕에 말린 기요, 당최 농약없는.”
구수한 말씨로 보리밥 맛을 부추겼다.
쌍까풀 진 눈에 붉으레한 얼굴의 여주인은 묻지도 않았는데 나이를 말했다.
“올해로 나이 육십둘이요. 먹은 것이 나이라 그기 그냥 먹은 나이인 줄 알았는디 그기 아니요. 내가 맹그는 국숫맛이 이 나이 육십둘에서 우러나온다는 걸 알아주소.”
여주인의 나이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젊었다.
“엄마두 차암.”
국숫집 넓은 홀에 엎드려 있던 젊은이들 중에 누가 엄마의 말을 밀막았다. 큰딸네 식구들이란다. 앳돼 보이는 딸과 그 딸이 낳았다는 앳된 딸과 아들이 식탁 사이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내일모레에 저 녀석이 군에 입대 받아놓고 저렇게 딩굴거린다오.”
엄마 곁에 엎드린 앳된 사내아이를 가리켰다. 여주인의 외손자란다. 그 여린 몸으로 어떻게 총부리를 메고 20개월을 살고 올 건지, 첫눈송이처럼 희고 맑았다.
“나가 스물시 살에 시집을 가 아들딸 하나씩을 낳고 남편 잃어 서울로 올라와 이 국수 팔아 자식덜을 다 공부시켰제. 그래도 울 부모 물려주신 이 튼튼한 사대삭신 탓에 아직 2,30년을 더 해도 꺼떡없지라우.”
국수를 만들어 식탁 위 가스불에 놓고는 열무김치 한 그릇과 배추김치를 더 내어왔다. 아내와 나는 처음 먹어보듯 김치맛에 홀렸다. 좀은 풀내가 나면서 아삭아삭 씹는 맛이 유달랐다. 국수냄비를 내려놓을 때까지도 우리는 그 풀내나는 아삭한 김치를 입에 넣고 있었다.
“아, 김치만 먹덜 말고 얼릉 국수 좀 들어봐요. 멸치 좋은 놈과 다시마 국물낸 걸로다 만들었응께. 농약이란 거 읎이 키운 거니까. 우리 꺼넌”.
그 말에 아내와 나는 오랜 걸음 끝에 이 집에 오기를 잘 했다며 양껏 국수를 들었다. 땀을 닦아가면서 내가 먹는 만큼 아내도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했다.
“시상에 참 좋은 처자 같은디.”
여주인이 아내를 봤다.
“내가 한 세상을 살아봉께 여자로서는 남편만한 남자가 없으이. 종로든 광화문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들 불러 세워놓고 다 물어봐. 처녀시절에 만난 남편만한 남자 있는가. 남편을 잘 받들고 집안일을 잘하면 복 받지. 그러면 남편은 지어미가 또 엔간히 사랑스럽지 안하겠는가.”
여주인은 입심 좋게 예전 시골 어머니가 누나들한테 일일이 타이르던 그 말을 하고 있었다. 낯선 서울에 올라와 이 나이 먹도록 누구 남의 잔소리 같은 말을 멀리하며 살았다. 남에게 그런 말을 해줄 사람도 없고, 그런 말을 받아들일 우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여주인의 그런, 식상한 말이 왜 우리 가슴에 이리 편안하게 와 닿는지.
이제는 나이를 먹어 그런 말을 들을래야 들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일까. 도회지 삶을 살아오며 남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나의 것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탓일까.
밥상머리에 앉아 듣던 그 아련한, 지금은 이승에 안 계시는 어머니의 말마디 같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먼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리밥과 열무김치, 그리고 나이 먹은 웃사람의 너무나 마땅한 부부의 도리, 또한 방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 책을 읽는 그 딸네 식구들의 정겨운 모습,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인 듯도 했다.
여주인은 우리 곁에 눌러앉아 이런 저런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혼자 살아온 외로움이 그이의 말속에 깊숙히 배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젓가락을 들면서 일일이 대꾸를 해드렸다. 그 잠시 한 순간이라도 우리를 가족으로 느끼는 듯해 나도 편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국수를 먹는 내내 고향의 안방에 와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외식을 할 일이면 으레 보성국숫집을 찾았다. 이제는 우리가 가면 여주인이 우리를 반겨 맞아준다. 그러면서 밉지 않게 우리가 먹는 일을 일일이 챙겨준다. 국수를 다 먹고 돌아올 때면 보성 좋은 볕에 말린 ‘고칫가루’로 만든 무청김치도 한 그릇 아내 손에 들려준다.
“내가 맹긴 김치 누가 맛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읎어.”
그러며 문밖까지 배웅해 준다.
방학을 하고 미국에서 딸아이가 오면 이 댁을 찾아와 또 국수를 먹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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