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관대한 힘
권 영 상
지난 토요일이다.
주말농장에 배추모종을 하러 갔다. 모종을 하러온 사람들이 많았다.
내 옆자리 밭엔 젊은 부부가 어린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와 배추모종을 하고 벌써 무씨를 넣고 있었다.
나도 대충 풀김을 매고 사온 모종을 심었다. 반쯤 심고있을 때다.
“아니, 남의 밭에 이런 상자 올려놓으면 되나요?”
퍼머머리를 한 남자가 밭머리에 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아이 엄마가 얼른 빈 모종상자를 들고 왔다.
건너다보니 그쪽 밭엔 목요일이나 금요일쯤 무씨를 넣은 모양이었다.
“내 밭 소중한 걸 알면 남의 밭 소중한 것도 알아야지, 무씨 넣은 밭을 이렇게 밟으면 어떡해요, 이 발자국 좀 보세요. 상식들이 없어도 보통 없는 분이 아니군요.”
퍼머머리 사내가 밭에 난 발자국을 휴대폰으로 찍으며 화를 냈다. 초등학생 아들이 모르고 밭을 밟은 모양이다. 그 소리에 아이의 아버지가 ‘미처 몰랐네요.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아이 공부를 어떻게 시켰기에 이 모양이에요. 가정교육이 엉망인가봐.”
사내는 분에 못이겨 이제는 아이의 부모를 향해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아무 관계 없는 내가 듣기에도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결국 아이의 아버지와 사내는 언성을 높여 싸우고 말았다.
한참 싸우던 사내가 이 일을 인터넷에 올리겠다며 제 아내를 앞세우고 가버렸다.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만큼 손톱만큼도 피해를 입고는 못사는 게 도시사람들이다.
오늘도 나는 가을상추와 쪽파를 심으러 다시 밭에 갔다.
가면서 그 퍼머머리 사내 밭의 무씨가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다.
가 보니, 밟힌 흔적없이 쪽 고르게 났다. 다행이었다.
씨앗의 힘이란 사람과 달리 대범하다.
밟혀도 아무 상처없이 파랗게 올라온다.
무순의 이 관대함을 오늘 새롭게 배운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 마음이 담긴 디자인 (0) | 2012.09.16 |
---|---|
2012년 3분기 우수문학도서 (0) | 2012.09.14 |
보성 국숫집 아줌마 (0) | 2012.09.07 |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미루나무 (0) | 2012.09.06 |
시계가게 시계들은 저마다 시간이 다르다 (0) | 2012.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