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미루나무

권영상 2012. 9. 6. 11:26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미루나무

 

권영상

 

 

 

 

미루나무 꼭대기에

오색 구름이 걸려 있네.

봄바람이 몰려 와서

걸쳐놓고 도망 갔어요.

 

지금은 모르겠다.

예전,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미루나무’라는 동요다. 살면서 문득 문득 이런 동요가 내 입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다.

미루나무는 우리 땅에 흔하게 자라던 나무다. 주로 마을 앞 개울가나 방죽, 논둑길이나 버려진 습지가 그들의 거처였다. 6,70년대 신작로 가로수는 대부분 이 미루나무였다. 미루나무는 미국에서 들어온 버드나무라 해 미류(美柳)나무라 하다가 미루나무로 바뀐 말이다.

 

예전만 해도 미루나무는 풍경화 속에 감초처럼 들어가는 소재였다. 아무리 잘 그려진 농가의 풍경화도 거기 키 큰 미루나무 한두 그루 없으면 왠지 허전해 보였다. 그만큼 미루나무는 우리 땅에서 우리와 같이 자라온 친근한 나무였다.

미루나무가 민중들 속에 갈등없이 다가선 데는 까치라는 동반자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까치는 우리 민중에게 더없이 살가운 존재였고, 까치가 둥지를 트는 곳이 미루나무이다 보니 쉽게 받아들여진 듯 하다.

미루나무는 농가에 별 도움되는 수목이 아니다. 성냥과 기타 음식갑의 재질로 사용된다고 하지만 민간의 생계에 별 도움을 준 나무가 아니었다. 기껏 화목으로나 쓰였을까, 그 정도였는데도 미루나무는 별 저항없이 민가나 민가 근처에 발을 딛고 우리와 함께 살았다.

 

 

 

미루나무의 가장 특 공헌은 가로수다.

키 큰 미루나무 가로수가 신작로 양편에 나란히 서 있는 길은 아름다웠다. 그 모습은 마치 심심하고 지루한 대지가 만들어내는 특별무대 같았다. 하늘을 향해 돌출하는 긴 초록색나무의 행렬은 이국적이었다. 미루나무 가로수는 구불구불한 농로 보다는 새로 닦아놓은 넓직한 신작로 가로수로 주로 쓰였다. 신작로가 읍내를 향해 뚫려 있어 그런지 모른다. 두 줄로 곧게 선 미루나무 가로수에서는 벌써, 도회풍의 반짝이는 냄새가 났다.

 

미루나무가 만들어주는 긴 그늘과, 자갈밭투성이의 신작로.

그 길은 어린 우리가 혼자 걸어가기엔 외롭고 거친 길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지루할 정도로 먼 길이다. 그러나 그 길 끝에서 만나는, 새로운 것으로 가득찬 읍내! 미루나무 가로수 길은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유혹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엔 남대천이라는 넓은 내가 있었다.

그 냇가에 미루나무 숲이 있었다. 수십 수백 그루였다.

모두 구름에 닿을 듯이 키가 훤칠했다. 한 시간씩 공부를 마치고 창가에 다가가면 새끼줄을 따라 올라가는 나팔꽃 덩굴 사이로 미루나무 숲이 보였다. 그 미루나무 우듬지에 까치집이 있었다. 한 나무 건너 한 채씩 있을 만큼 많았다. 바람 부는 날에 보면 까치들이 그 높은 나무 위에서 푸른 하늘 푸른 바람을 탔다.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치솟다, 떨어질 듯 곤두박질을 치다, 온몸 가득히 바람을 안고 바람에 밀려 뒷걸음질을 치다, 깟깟거리며 서로 엉겨붙어 놀다, 어디론가 휙 날아갔다 또 언제 보면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 모습이 자유로웠다. 당시만 해도 우리들에겐 걱정거리가 없었다. 과외공부에 시달릴 일도 없었고, 공부에 신경쓸 일도 없었다. 단지 부모님 일손을 돕는 일이 힘들다면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도 까치의 자유로운 바람타기가 부러웠다. 어린 우리들에게 ‘자유로움’이라는 걸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게 그 까치들이 아닌가 한다.

 

그후,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때가 있었다.

강원도 산골짜기 학교였는데, 그 학교 앞 개울가에도 미루나무가 많았다.

옆 반에서 누군가가 풍금을 켤 때면 나는 창밖 해바라기 줄기들 사이로 미루나무 바라보기를 잘 했다. 산골 학교라 늘 갇혀 사는 내게 미루나무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웠다. 이미 나의 몸엔 이성에 대한 감정이 몰래 크고 있었다. 하늘에 닿을 듯이 서 있는 미루나무를 보면 그 누군가가 목마르듯 자꾸 떠올랐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오색 구름이 걸려 있네.

봄바람이 몰려 와서

걸쳐놓고 도망 갔어요.

 

그 그리움을 이길 수 없을 때면 풍금 앞에 앉아 이 노래를 불렀다. 내 마음 높은 곳에 누가 오색 구름을 걸쳐놓고 갔는지 나는 그가 그리웠다.

 

 

80년대 이후부터 미루나무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로수로 적절하지 않고, 점화 수단인 성냥이 개스불과 라이터에 밀리면서 더욱 쉽게 사라진 듯 하다.

 

내가 서울에 정착해 살며 최후로 본 미루나무 가로수 길이 있다. 지금의 서초구청과 외교센타 앞길이다. 이 건물들이 90년대 초에 세워졌으니까 그 이전의 미루나무 가로수길은 운치가 있었다. 그때 미루나무들은 한창 성년의 나이였다. 두 아름씩 되는 나무였는데 도회의 가벼운 건물들이 이 견고한 미루나무 때문에 좀더 깊이 있는 멋을 누리는 듯 했다.

 

그때 나는 서너 살 되는 딸아이를 데리고 이 길을 걸어 우면산을 찾아가곤 했다. 미루나무길은 한여름 정오 무렵이 좋다. 그림자가 모두 길 위에 눕는다. 햇빛에 반짝이는 아파랑이들과, 이파랑이들이 만들어 내는 초록잎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 온몸이 살아오르는 듯 했다. 그 좋던 미루나무 가로수도 외곽순환로를 만들면서 그예 잘려나가고 말았다.

 

미루나무 가로수는 그렇게 우리나라의 길 위에서 쫓겨났다. 대신 그 자리에 플라타너스가 심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 또한 길지 않았다. 공해에 강하다는 은행나무에 또 밀려나 사라지고 말았다.

 

가끔, 미루나무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근데 요 얼마 전 동네 철물점에 전구를 사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좁은 골목에서 미루나무를 만났다. 전선줄 때문에 둥치가 잘려나간, 볼품없는 몰골이었다. 가끔 이 길을 지나쳤는데도 그게 미루나무인 줄 몰랐다. 시대가 버린 나무의 뒷모습이란 게 그렇게 초라했다.

서울대학교 정문 초입에서도 미루나무를 만났다. 한 예닐곱 그루는 되었는데 키도 크고 굵기도 아름드리는 될 듯 했다. 참 우연한 기회에 만났는데, 지난 내 인생의 잊혀진 한 부분을 찾은 것 같아 너무도 반가웠다.

 

사라진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한다.

아름답지 않다면 누가 사라진 것들을 기억해 줄까.

과거가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