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혼자 보기 아까운 가을 들꽃 열전

권영상 2012. 9. 16. 20:16

혼자 보기 아까운 가을 들꽃 열전

권영상

 

 

 

 

휴대폰을 가지고 집을 나선다. 아직도 시골스타일이라 전화 이외의 용도로 써 본 적이 드물다. 오늘은 작정을 했다. 공짜폰을 들고 다니며 메모 하듯 뷰 파인더를 들이댄다.

 

주말농장에서 김장밭을 매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나를 유혹하는 게 있다. 주차장 주변 농가 울타리에 핀 꽃들이다. 저번엔 잘 가꾼 상추를 한번 찍다가 호통을 들었다.

“거, 뭔 눔이요!”

살구나무집 아저씨가 평상에 누워 나를 꼬나봤다.

상추 훔쳐가려고 온 사람 아니냐며 휴대폰을 내놓으랬다.

그이가 무서워 오늘은 그 집 곁으로는 아예 못 가고 이웃집 울타리를 돈다. 취꽃이 보란 듯이 폈다. 곱다. 꽃잎이 희고 두터워 구절초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기품이 있다. 그 아래 이것 좀 보레이. 이 나팔꽃 좀.

이게 아침에 피고 저녁에 저절로 지고 마는 줄 알았는데 져도 이렇게 무슨 연기를 하듯이 졌다. 바람개비 모양이다. 나팔꽃 곁으로 방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한 분이 지나간 게 아닐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또 꽃을 찾았다. 회양목 그늘에 처녀처럼 숨어 피는 옥잠이다. 순결하다. 발소리를 낮추어야겠다. 하룻밤 더 자고 나면 내일 아침쯤 이슬을 받으며 개화할 것 같다. 희고 멀끔한 옥잠의 신선한 아침을 그린다.

 

이쪽 개울을 건너면 고추밭 머리에 해바라기.

해바라기 노란 꽃판을 본다. 씨앗마다 그 안에 눈꼽만치 작은 꽃이 있다. 해바라기는 수백 개의 작은 꽃을 피워놓고 벌을 불러 단번에 수분을 할 모양이다. 경제를 안다. 해바라기 껑충한 발 아래 요렇게 눈부신 채송화가 폈다.

 

 

 

 

농가의 마당이 다 차도록 채송화를 심어 꽃을 즐기는 집을 봤다. 가을볕이 쨍, 할 때에 보면 노랑 하양 빨강 빛이 어우러져 눈을 어리게 한다.

 

차에 시동을 걸고 주말농장 주차장을 나온다.

그냥 집으로 가지 않고 청계산 옛골을 지나 신구전문대학에서 운영하는 식물원을 안 갈 수 없다. 봄이면 아내와 여기 연못 가에서 캔 쑥만도 몇 바구니다.

연못가에 부추와 코스모스가 폈고, 못 안에 수련과 함께 황새가 들어와 섰다.

 

거기서 다시 성남비행장 대로를 타고 세곡동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한다. 양재역을 향해 가다보면 헌인릉이 나온다. 나는 거기에 들러 FM을 듣는다. 오후 어느 쯤이면 국악 시간대다. 명창 박병천 선생의 진도 씻김굿을 들으며 그 절절히 설움많은 목청에 젖는다. 아리랑도 밀양아리랑은 흥겹다. 서러움을 풀어도 어깨 들썩거리는 흥겨움으로 푸는데 진도 아리랑은 슬퍼도 슬퍼도 그렇게 슬프게 한을 풀어낼 수 없다.

이 헌인릉에 묻히신 태종 임금이야 살아 수많은 악업을 지으셨으니 속에 감추신 슬픔이 많을 테다. 그게 또 서러우실까봐 착하신 세종 아드님께선 죽어서 여기 이 아버지 곁에 십여 년을 묻혀 있다 여주로 가셨다.

담쟁이 덩굴에 감긴 참나무 군락을 보고 돌아서는 내 앞에 작살나무가 보랏빛 열매를 달고 가을볕을 즐긴다.

 

오늘 늦은 밤부터 태풍이 온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등산화를 신고 우면산을 오른다. 집에서 10분 거리. 이 산 여기저기에 운동기구가 있다. 작년 가을 삐끗한 내 허리를 돌보기 위해 우면산이 주말마다 명의 노릇을 한다.

소나무 숲에 들어서자, 이게 뭔가. 버섯이 지천이다. 태풍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 이들은 이 숲에서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떨어진 솔잎을 뚫고 오르는 버섯이 대가리를 힘차게 솟구쳐 올린다. 근데 부끄러운 건 버섯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거다. 습하고 어둑한 곳에서 또 한 세상을 살다가는 버섯무리를 이름도 모른 채 바라본다.

잘 구운 빵 모냥, 한 사발 싸놓은 소똥 모냥, 구름 모냥, 우산 모냥, 밤톨 모냥, 불알 모냥....

 

 

지난 여름 산사태난 골짝에 오니, 여뀌가 죽어라 한창이다. 그 곁에 물봉선, 고만두풀이 상처난 자리 위에서 꽃을 피운다. 자연이란 사람보다 언제나 더 먼저 용서하고 더 먼저 아픈 과거를 잊는다.

 

 

산을 돌아 내려와 약수터 앞에 서니 구청에서 심은 칸나가 한창이다. 불타는 듯한 꽃빛이 곱다 못해 요염하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나도 키워본 칸나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부들도 찾아가 인사를 하고, 고치풀 숲에 핀

 

 

하늘말나리도 찾았다. 참 기이할 정도로 신비한 것이 자연이 피우는 꽃이다.

 

최초의 꽃은 누가 발명했을까. 지구에 숲이 만들어지고 다시 1억 5천만 년이 지난 뒤다. 처음으로 태어난 꽃이 목련이다. 목련나무가 목련 꽃을 발명한 이후부터 식물은 우후죽순으로 꽃 피우는 걸 배웠다. 들판에 꽃이 피면서 초식동물이 생겨났고, 그들은 꽃속의 꿀을 통해 단백질을 얻었다. 목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육식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지금 이 들판에 소리없이 피어나는 들꽃 덕분이다.

 

주말의 나의 일정이 이렇게 길었다. 아니다. 또 있다. 밤 9시 40분에 연속사극 “대왕의 꿈”을 보아야 한다. 그게 끝나면 아파트 마당에 나가 저녁 운동을 또 한번 하고 돌아오면 밤 11시 30분. 그때에야 나의 일정이 끝나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