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세상을 유유히 사는 이들

권영상 2012. 9. 24. 10:15

세상을 유유히 사는 이들

권영상

   

 

 

남대문역 계단을 오를 때면 아침마다 만나는 이가 있다. 마흔 중반의 사내다. 검정 점퍼를 입은 사내는 출구가 올려다 보이는 계단 끝자리에 두 발을 모으고 얌전히 앉아 있다. 무릎 위에 깎지 낀 손을 올려 놓고는 정물처럼 미동도 않는다.

사내 곁에는 구두 한 컬레가 있다.

반듯하게 잘린 보루지 위에 단정히 올려져 있다. 얼핏 보아 사내가 구두를 벗어놓고 앉은 듯 하지만 그게 아니다. 구둣날이 서고, 빛깔이 선연한 걸로 보아 공장이나 구둣가게에서 갓 지어온 게 분명하다. 얼핏 보아도 설계가 제대로 된 구두 같다. 처음 나는 자신의 가게에서 만든 구두를 광고하러 나온 영세 구두가게 주인인가 했다.

 

근데 어느 날엔가 보니 보루지 위에 ‘3만원’이라는 매직글씨가 써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구두가 팔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어떤 날엔 여성화가 간촐하게 놓여 있기도 하다. 그것도 딱, 한 컬레! 장사치고 좀 막연한 장사 같다. 외양이 마음에 든다 해도 사이즈나 색상이 맞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구두란 다른 물건과 달리 구두에 맞추어 신을 수 없는 것이다. 색상과 사이즈와 형태, 이 세 가지가 대충 맞아야 산다. 그렇지 않고는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딱 한 명의 그 적임자를 만나긴 어렵다. 그런데도 그는 늘 거기에 나와 앉아 있다.

 

한눈에 반해 구두를 탁, 사게 될 그 사람은 언제 나타날까. 할 일이 없으면 가끔 그 일을 생각한다. 그 구두 임자는 지금 어느 하늘 밑을 지나고 있을까. 그가 어찌어찌하여 이 남대문역 계단을 오른다 해도 그때 그 사내가 없으면 둘은 만나지지 않는다. 남대문 시장이라는 가장 상술이 발달된 곳에서 가장 용한 방식으로 구두를 파는 그가 신비하기까지 하다.

 

이와 비슷한 이를 몇 해 전 마등령에서 만났다.

설악을 오르다가 백담계곡에서 큰비를 만났다. 그때 나는 슬그머니 대청봉을 포기하고 오세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덜 위험한 마등령을 탈 요량이었다. 오세암을 지나 풀섶에 맺힌 빗방울을 털며 마등령에 올라섰을 때다. 비 그은 뒤로 여름햇빛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나는 바윗그늘 밑에 무겁게 메고 온 배낭을 내려놓았다.

“삼지구엽초 한잔 드시우.”

돌아다 보니 전에 없던 텐트가 있다.

그 텐트 앞에서 주전자에 물을 끓이던 사내가 나를 불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내다. 텐트 주변의 살림살이를 보아하니 아예 여기에 올라와 사는 이 같았다. 기갈에 좋다며 그가 내게 삼지구엽초 한 컵을 권했다. 장마 중이라 설악은 텅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라곤 그와 나 단 둘이었다. 발 아래 계곡으로 흘러가는 흰구름을 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그가 말했다.

 

“마음에 그리던 여자를 찾다가 결국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오.”

쉰 후반의 그는 그러고 보니 늙수그레한 총각이었다.

“이젠 틀렸지요?”

사내가 삼지구엽초 남은 물을 입에 털어넣으며 웃었다.

“어딘가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겁니다.”

마음에 그리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가를 물으려다 말고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이번 생에 못 만나면 다음 생을 기약해 봐야지요.”

사내는 ‘틀렸지요? 하면서도 마음으론 그를 기다리고 있는 투였다.

허탈하게 웃으며 그가 용아장성에 부딪는 번쩍이는 햇빛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음 생에는 꼭 그 분을 만나 백년 해로하세요.”

나도 농담삼아 그렇게 받았다.

그렇게 농담같은 이야기를 하며 삼지구엽초 한 컵을 마시고는 일어섰다.

 

 

사람만 그렇게 막연한듯한 인생을 사는 게 아니다.

개미귀신도 그렇다. 개미귀신은 예쁜 명주잠자리가 되기 전의 애벌레다. 그는 물에서 나와 물속에서 먹던 먹이를 버리고 대신 개미를 잡아먹는다. 개미귀신은 개미가 다닐만한 모랫벌에 오목하니 개미지옥을 파고 들어가 앉아 개미를 기다린다. 참 막연한 일이다. 지름이 5센티도 안 되는 그 개미구멍으로 지나가는 개미가 대체 몇 마리나 될까. 몇 마리의 개미가 지나가다 개미귀신에게 걸려들까. 막연히 하루종일, 또는 이틀 또는 사흘을 그렇게 기다리다 끝내는 굶주려 죽는 곤충이 개미귀신이다. 어찌 보면 바보스럽다.

꽃들도 그렇다. 그 많은 들꽃들이 모두 벌이나 나비의 수분 혜택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다. 그렇지 못한 꽃들은 벌이나 나비가 올 때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시들어버리고 만다. 오직 종족 번식을 위해 사는 꽃들에게 있어 그 일은 비극 중의 비극이다.

 

남대문이나 마등령에서 만난 두 분의 기다림은 범인의 기다림과는 다르다. 막연하고도 목마른 기다림이다.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만남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일을 막연히 기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런 아득한 기다림에 어쩌면 비극적 황홀감이 숨어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구원을 기다리다가 황홀히 임종하는 종교인들의 정서같은. 마음에 그리는 짝을 다음 생까지 찾아가겠다는 사내나, 구두에 맞는 적임자를 막연히 기다리는 사내의 심정에 그런 황홀감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지 모르겠다. 남대문역의 사내는 구두 임자를 오늘도 만났을까. 유유자적하게 인생을 사는 그들이 때론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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