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로가 사라졌다

젤로가 사라졌다 19회-원효

권영상 2024. 12. 9. 11:17

<월요 이야기 연재>

 

이야기 바다에 빠지다

 

15. 원효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다

 

물 한 그릇

 

 

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 나섰다.

의상과 함께 하는 두 번째 도전이다.

그때가 661년 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해였다.

당나라엔 유명한 고승 삼장법사 현장이 있었다.

그분은 제자 40명과 함께 온갖 난관을 헤쳐 부처님이 태어나신 인도에 도착했다.

그후 날란다 대학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많은 나라 젊은이들이 이 새로운 공부를 위해 현장 스님을 만나러갔다.

“의상, 나는 무지렁이 백성들을 위한 불법을 배워올 걸세.”

“원효, 자네의 총명함이 빛날 때가 곧 올 거네.”

두 사람은 신라를 위한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긴 여정 끝에 당항포구가 나오는 길목에 들어섰다.

찌뿌둥하던 하늘이 끝내 비를 뿌리더니 날도 저물었다.

 

10년 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을 때도 그랬다.

비가 내리고 컴컴한 밤을 이용해 고구려 변경을 지날 때다. 그만 고구려 병사에게 첩자로 오인되어 붙잡혔다.

그때도 원효는 의상과 함께 떠났고

지금도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누가 뭐래도 신라의 가장 총명한 젊은 승려다.

 

항구가 바라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오락가락 하던 비는 점점 거세게 내렸고, 날은 금방 어두워졌다.

비와 어둠을 피할 곳을 찾다가 마침 으슥한 토굴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비를 피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두 사람은 간신히 잠자리를 만들어 몸을 뉘였다.

곤하게 자던 원효가 잠에서 깨었다. 깊은 밤이었다.

오래 걸어 그런지 목이 말랐다.

더듬더듬 물이 있을 만한 곳을 더듬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물그릇에 번들거리는 물빛이 보였다.

원효는 그 물그릇을 들어 벌컥벌컥 다 마셨다.

“달고 시원하구나.”
원효는 또다시 깊은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곳은 토굴이 아니라 무덤이었다.

원효는 간밤에 마셨던 물그릇을 찾았다. 그 물은 해골바가지에 고인 빗물이었다.

갑자기 구토가 일었다.

욱욱욱, 토할 때다.

이상하게도 부르르 떨리는 깨달음의 울림을 온몸으로 느꼈다.

‘간밤에 그렇게 시원하던 물이, 지금은 왜 역겨운가.’

배를 타러 가기 위해 바랑을 싸면서도 원효는 그 생각에 몰두했다.

‘시원함도 역겨움도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법. 불법은 마음 안에 있다.

그런데 어찌 불법을 구하러 먼 당나라로 갈 것인가.’

원효는 의상의 손을 잡으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돌아가겠네. 그대는 불법을 잘 배워 돌아오시게.”

원효는 가던 길을 되짚어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새벽 스님

 

 

617년.

원효는 상주 경산의 밤골터에서 태어났다.

꿈에 새벽별이 품속으로 드는 걸 보고 어머니는 임신을 했다. 열 달이 차는 어느 날 아기를 낳으러 친정집으로 가던 도중에 산통이 왔다. 남편의 털옷을 밤나무에 걸고 그걸 부여잡고 아기를 낳았다.

그가 원효다.

성은 설, 이름은 생각 사.

원효라는 이름은 나중에 불교에 귀의하며 스스로 지은 법명이다.

 

원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태학에 입학하여 한학과 유교에 대해 배웠는데

이내 스승의 공부를 능가하여 배울 게 없었다.

화랑이 되어 산천을 다니며 몸과 마음을 수련하던

15살 그 무렵

어머니를 잃었고

깊은 생각 끝에 출가하였으며

황룡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사람들은 새벽별 태몽을 꾸고 태어난 그를 새벽스님이라 불렀다.

새벽스님은 공부에 목말라

영취산 흥국사에 머무는 낭지 스님을 찾아가 법화경을 배웠고, 백제에 내려와 불법을 가르치던 고구려 보덕 스님을 찾아가 공부한 끝에

일본은 물론 중국조차 놀랄 만한 훌륭한 책들을 남기고

절을 떠나 힘없는 백성들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저잣거리 속으로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라.’

 

원효는 광대들한테 얻은 호리병을 허리춤에 차고

장터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췄다.

노래부르고 춤 춰볼 일 없는 장터 사람들은 스님을 기다렸다.

 

“저기 새벽 스님 오신다!

나무아미타불, 노래 부르며 오신다.

오신다 오신다

공덕 닦으러 오신다.”

 

사람들은 새벽 스님을 즐겁게 맞았다.

새벽 스님이 춤추며 오시면 다들 일어나 함께 춤추었다.

근심을 잊기 위해

두 팔을 들어 휘두르거나

걱정을 떨치기 위해 덜렁덜렁 발을 바꾸어 들어올리며

춤을 추었다.

장터 사람들이 하나 둘

어깨 춤을 추며 새벽 스님 뒤를 따랐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라.‘

 

춤추다가 힘들면 앉아서 쉬고, 목 마르면 물 마시고,

술 있으면 저잣거리 사람들과 함께 술 마시고

저잣거리 사람들이 욕쟁이 말을 하면

함께 그 말을 따라 하며 웃고.

이제 새벽 스님 머무르는 곳은 분황사도 아니요, 영취산 흥국사도 아니다.

까막눈이 사람들이 읽을 수 없는

책을 쓰면 뭣할 것이며

어려운 불법은 어느 귀에 쓸 것인가.

저잣거리는 새벽 스님 집이 되었다.

 

’저기 새벽 스님 오신다. 나무아미타불‘

 

신라 땅에 사는 사람치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죄를 지었으면 부처님께 죄를 빌어 마음을 씻고

바른 마음으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