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로가 사라졌다

젤로가 사라졌다 20회- 수로부인

권영상 2024. 12. 16. 20:48

<월요 이야기 동시 연재>

 

이야기의 바다에 빠지다

 

 

16. 수로부인

 

 

헌화가

 

봄날

강릉길이 열렸다.

강릉태수로 떠나는 순정공 일행에게 있어

해안길은 멀고 험하다.

 

말을 탄 순정공이 맨 앞에 섰다.

그 뒤에 순정공의 부인 수로가 가마를 탔다.

그리고 호위 병사,

책과 옷을 실은 수레가 뒤따랐고

강아지며 고양이가 뒤따랐다.

 

강릉길이 이제야 열린 데는

지금 가마를 타고 가는 수로부인 때문이기도 하다.

얼굴이 너무 고왔다.

하늘도 넘볼 만큼 땅도 넘볼 만큼 예뻤다.

하루를 걷고

그 이튿날 벼랑길을 돌아갈 때다.

“여기서 쉬었다가 가리라.”

순정공은 부인을 빼앗길 염려가 없는

높은 벼랑을 등에 지고 피로한 발길을 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높은 벼랑 위에 핀 봄날 철쭉꽃이

수로부인의 마음을 빼앗았던 거다.

부인은 서슴치 않고 말했다.

“누가 저 꽃을 꺾어 주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꽃은 낮달처럼 높고, 가파르고, 위험한 바위 끝에

오롯이 피어 있었다.

“위태로운 일이옵나이다.”
시종이 만류했다.

그 때 암소를 몰고 지나가던 한 노인이 그 말을 듣고 찾아왔다.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말했다.

 

예쁘신 여인의 일에 늙은이가 참견하는 것이

싫지 않으시다면

제가 그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수로부인이 대답했다.

 

아녀자의 욕심을 탓하지 않으신다면

기꺼이 그 꽃을 받겠나이다.

 

암소의 고삐를 쥐고 있던 노인은 그 손을 놓고

위태로운 바위 절벽을 타고 기어올랐다.

그리고 그 끝에 붉게 핀 꽃을 꺾어

부인에게 바쳤다.

 

 

해가사

 

수로부인은 곱고 환한 철쭉꽃 묶음을 안고

다시 길을 떠났다.

오후쯤 임해정을 들러 거기서 잠시 쉴 때였다.

바닷물이 벌떡 일어서듯 거칠어지더니 불쑥 해룡이

그 바다를 헤치고 걸어나왔다.

해룡은 다짜고짜 어여쁘신 수로부인을 어깨에 들처메고

바다로 돌아 들어갔다.

“내 이럴 줄 알고 가슴 졸였거늘!”
순정공이 한숨을 내쉬며 장탄식을 하였다.

설마 설마 하던 일이 이렇게 닥치고야 말았다.

다들 해룡이 걸어들어간 바다를 들여다보지만

부인이 돌아나올 기색은 없었다.

그때 이 사정을 오래도록 지켜보던 한 노인이 찾아와 말했다.

“옛말에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했으니 백성들을 모아 막대기로

땅을 치며 노래 부르면 내어 줄 것이오.”
시종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저마다 손에 막대기를 들고 발을 구르며 바다를 향해 노래를 불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네 만약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

 

노인의 말이 맞았다.

바다를 헤치고 수로부인이 사뿐사뿐 걸어나왔다.

젖은 자국 하나 없었다.

단지 부인의 몸에선 이 세상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순정공 일행은 또다시 강릉 길을 떠났다.

부인은 어찌나 예쁜지 못을 지나면 못에서

깊은 산을 지나면 산에서

신령이 나타나 부인을 둘쳐메고 갔다가 도로 돌려주곤 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강릉에 도착했다.

 

 

수로부인을 만나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

수로부인을 자연스레 만났다.

듣던 대로 정말 예쁘시네요, 그 인사를 드리려다 젤로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초록풍뎅이야, 머뭇거리지 말고 묻고 싶은 것 어서 물어보렴!"
부인은 듣기보다 더 예뻤다.

"헌화가에 나타나 철쭉꽃을 꺾어주고, 해가사에 나타나 해룡에게 잡혀간 부인을 살려낸 두 노인은 누구인가요?"
젤로가 좀 더 가까이 다가앉으며 물었다.

"그 분들은 두 분이 아니고 한분이시다. 천 개의 손과 눈을 가지신 분. 간절한 소원을 말하거나 딱한 일을 보시면 나투어 고충을 풀어주시는 관음의 다른 모습을 한 분이다.."

"원하는 바를 들어주신다는 관음보살이시군요."

"그렇다. 궁금한 게 또 없누?"
시종들이 짐을 나르는 걸 보며 부인이 질문을 재촉했다.

"해룡이나 신령들이 부인을 바다나 산속으로 붙잡아 가는 이유는 뭐죠?"
부인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내가 벼랑 끝 예쁜 철쭉꽃을 꺾어 가지고 싶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그들 역시 아름다운 수로부인을 꺾고 싶어 그리 했다, 이거로군요."
"그 외에 달리 생각할 이유가 없구나! 나의 오만일까."

부인이 소리내어 웃었다.

젤로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