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이야기동시 연재)
이야기 바다에 빠지다
14. 이차돈
천신을 섬기다
법흥왕은 불교를 들여오길 원했다.
막연히 천신의 명을 받아 살아가는 신라가 아닌
사람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신라를 만들고 싶은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6부의 귀족들은 참지 못했다.
“아무리 왕이라 하여도 천신의 명을 어기면 아니 되옵니다.”
“불법(부처님의 말씀)도 천신을 이길 수는 없나이다.”
“궐을 짓거나 우물을 파는 일도 천신에 여쭈옵고, 하늘로부터 그 답을 받아 행해야 하는 법, 불법은 가당치 않나이다.”
열을 올리는 부족장들에게 왕이 나직이 물었다.
“천신이 사람의 일을 어찌 알며, 사람이 천신의 대답을 어찌 듣는단 말이요?”
그러자 사량부 족장이 대뜸 나섰다.
“천신은 점괘로 그 대답을 내리나이다. 왕께서 손을 씻으시거나 헛기침하시는 일조차 점괘대로 행하셔야 하옵지요.”
“그러면?”
왕이 물었다.
“그러면 하시는 일에 어김이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천신을 모신 천경림(천신을 경배하는 숲)을 가까이 하시옵소서.”
나라를 시대에 맞게 튼튼히 변화시킬 방도를 말하면
6부의 족장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을 빼앗길까 봐
앞다투어 왕의 입을 막았다.
어전에서 나온 왕이 뜰을 걸으며 가까이 따르는 사인 이차돈에게 말했다.
“참으로 저들을 이해할 수 없도다.”
이차돈도 오로지 천신! 천신! 하는 부족장들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부처님께 복을 빌고, 죄를 씻고 싶어 절을 지어주기를 바라는데 저들은 점을 쳐 천신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만 하다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마마.”
이차돈은 왕의 고단한 마음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그대도 알지 않은가.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부족장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왕이 나라를 강성하게 이끌어 가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저들에게 끌려다녀야 하는지......”
그런 날이면 이차돈은 왕과 신라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을 오래도록 고민했다.
끊임없는 실랑이
어느 봄이었다.
왕이 나랏일을 곰곰이 생각하며 뜰을 걷고 있을 때다.
6부의 부족장들이 달려와 왕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마마. 이렇게 한가할 때가 아니옵니다. 마마께서 천경림에 절을 짓도록 허락하셨나이까?”
그들은 당장 어찌할 것처럼 왕의 대답을 요구했다.
왕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모량부 족장이 또 다그쳤다.
“마마, 천경림은 천신의 기운이 서려 있는 신성한 성지나 다름없는 곳인데 거기에 절을 짓게 하다니요. 어림없나이다.”
“어서 대답하시옵소서! 그곳이 천신의 성지임을 모르고 내리신 명이시나이까.”
왕은 이들의 독촉을 다 듣고 난 뒤 시침을 떼듯 입을 열었다.
“그런 적 없소. 천경림에 절을 짓게 하다니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번에는 한기부 족장이 왕 앞으로 다가갔다.
“몰라도 너무 모르옵나이다. 지금 이차돈이 왕께서 그리하라 했다며 절 지을 자리의 나무를 함부로 베고 있나이다. 이를 어찌 하오리까.”
그 말에 왕은 짐짓 성을 내며 신하들을 불렀다.
“여봐라. 지금 당장 형틀을 갖추어 놓고 속히 이차돈을 잡아들이라.”
순교
이윽고
이차돈이 신하들 손에 잡혀 와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이 위엄을 갖추어 물었다.
“그대가 왕의 명이라 하며 천경림의 숲을 해친다는 말이 정말인가?”
이차돈은 이미 이 일이 어떻게 되어갈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마마, 부처님의 법을 신라의 종교로 삼으소서. 그리하시면 백성들도 부처님의 힘을 얻어 행복할 테고 마마께서도 나라를 강건케 하실 겁니다. 그런 높은 뜻을 도와드리기 위해 왕의 명이라 잠시 말한 것뿐인데 그게 무슨 문제오이까.”
그 말에 왕이 진노했다.
“아니, 이 무엄한 자를 보았나! 그대는 내가 가장 아끼는 신하인데 감히 나를 들먹이며 백성을 속이다니. 당장 이 자의 목을 베라!”
그러자 좌우에 서 있던 6부의 족장들이 술렁였다.
“마마, 이만한 일로 신하의 목을 베다니요.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한 번의 기회를 더 내려주소서.”
부족장들은 지엄한 왕명에 떨며 만류했다.
그러자 이차돈이 다시 말했다.
“소신이 저녁에 죽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침에 행하여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나이다. 마마, 저의 목을 베시어 나라를 살리소서!”
이차돈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길게 목을 뺐다.
칼을 높이 치켜든 형리가
이차돈의 목을 내리쳤다.
“아,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천신이 놀랄 일이야!”
이차돈의 목에서 흰 피가 한 길이 넘도록 뿜어 올랐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흐느끼듯 땅이 흔들렸다.
이 해가 527년, 이차돈의 나이 겨우 22살이었다.
천경림에 절을 세우다
이차돈 순교 이후,
6부의 족장들은 더 이상 왕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이로써 신라는 불교를 신라의 종교로 공식 인정하였다.
불교가 신라에 발을 들여놓은 지 100년 만의 일이다.
“백성들을 위해 천경림에 흥륜사를 세우시오.”
왕은 이차돈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도록 애썼다.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북산엔 자추사라는 절을 지었다.
또한 정치 체제를 6부 부족장 중심에서 벗어나 왕권 중심의 나라 기틀을 빠르게 고쳐 나갔다. 고구려 백제보다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불교가 가장 번성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불교는 서서히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흥륜사가 완공된 그날,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법흥왕이 타고 가는 연 안으로 초록풍뎅이 젤로가 날아들었다.
“그대는 누군가?”
왕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저는 미래의 나라 서울에서 온 젤로입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젤로는 위엄 있고, 또 한 편으로 자상해 보이는 왕의 무릎 위에 내려앉았다.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왕은 마치 이런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젤로를 맞아주었다.
“이차돈의 목을 베신 솔직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이차돈의 뜻대로 천경림에 절을 지으셨으면서 그를 죽이신 까닭이 무엇인가요?”
왕이 고개를 끄덕인 뒤 담담히 대답했다.
“반대의 반대를 일삼는 부족장들에 대한 나의 고민을 염려하던 이차돈이!”
왕은 거기에서 그만 눈물을 보였다.
“내게 말하기를 자신의 목을 베어 왕의 위엄을 살리면 신하들도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며 스스로 순교를 자처하였다.”
“아, 그런 약속이 있었군요.”
“그렇다. 신라와 신라 불교의 공인을 위해 귀한 목숨을 내놓았던 거다.”
왕이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았다.
“신라는 이차돈의 죽음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할 것이다.”
왕이 고개를 들었다.
“훌륭한 신라를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왕과 작별한 젤로는
법흥왕이 다스리는 경주의 하늘로 부웅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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