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고향 촛대바위를 사랑한 시인

권영상 2021. 12. 11. 13:52

<김진광 시인 추모사>

 

고향 촛대바위를 사랑한 시인

권영상

 

 

집을 나설 때다. 문자 메시지 수신음이 바지 주머니에서 들렸다. 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세상과 딱히 소통하고 싶지 않은 일요일 오후 3시경.

늦가을 집 근방 느티나무 오솔길에 들어섰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인데도 노란 느팃잎이 더는 견딜 수 없는지 맥없이 쏟아졌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그런 오묘한 한낮에 나는 홀로 숲길을 가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또 한 차례 수신음이 들렸다. 마지못해 메시지를 열었다. 떨어지던 낙엽들이 갑자기 뚝 멈추었다.

 

 

김진광 선배의 사망 소식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열지나 말걸!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선배가 이 가을에 왜 간다지? 나는 휑한 정신으로 중얼거렸다. 비록 우물거리는 말투였지만 선배의 목소리를 들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사모님께서도 결과가 좋아져 얼른 퇴원했으면, 하고 바라셨는데, 이렇게 문득 가시다니. 선배는 바람 없는 한낮에 무덕무덕 쏟아져 내리는 낙엽에 휩싸여 목숨을 놓았던 거다.

 

 

고향 삼척 촛대바위를 사랑하던, 촛대바위처럼 껑충한 키의, 시 잘 쓰고, 술 잘 먹고, 너스레 떨기를 즐기던 한 사내가 낙엽처럼 떨어졌다. 전화 통화를 할 때든 아니든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술 먹다가 쓰러지는 걸 보여주려고 그러냐며 나는 선배를 탓했다. 그때마다 권시인 무서워 그만 마셔야겠네, 하던 선배가 술잔을 내려놓듯 가버렸다.

 

 

선배를 말하자면 바늘에 실 같은 남진원 선배를 말해야 하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도규 선배시인을 말해야 한다. 세 분은 1970년대 중반부터 강원도 황지와 태백의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형제처럼 서로 동시를 공부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단하신 분들이다. 강릉교대로 치면 나는 그분들의 후배였고, 나도 정선군 어느 산골짜기 학교에서 혼자 동시를 쓰다가 이 세 분을 만나 ‘감자동인’으로 활동했고, 우리는 5집까지 동인지를 냈었다.

그 무렵이 우리 나이 30대 후반.

해마다 강릉 어느 여관방을 얻어 같이 밥을 먹고, 시를 이야기하고, 술을 마셨다. 그 감자동인 활동도 최도규 시인의 작고로 끝났다. 그분이 우리들의 맏형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후, 감자동인은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겨울밤이었다.

전화벨이 울었다. 김진광 선배였다.

“권시인 집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갈 거니 그리 알아요.

그러면서 택시를 타고 갈 거라 했다.

나는 아파트 마당에 나가 선배를 기다렸다.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선배가 탄 택시가 들어왔고, 나는 그가 메고 있는 가방을 받아 집에 들어섰다. 선배와 식탁에 마주 앉아 술부터 한 잔 했다. 선배는 내게는 강릉교대 한 해, 아내에게는 두 해 선배다.

선배는 그날, 삼척에서 서울로 올라와 <소년>의 김원석 편집장님을 만났고, <시대문학>과 <현대시학>에 들렀고, <아동문예>에 들러 박종현 주간님도 뵙고, 거기서 가져온 잡지이며 시집 몇 권을 밥값이라며 그 특유의 너스네를 떨며 내게 건네주었다.

“이건 진짜 밥값인데 사모님, 내일 해장국 부탁드립니다.”

선배가 두툼한 신문뭉치를 가방에서 꺼냈다.

 

 

수석이었다. 그 무렵 선배는 수석에 흠뻑 빠져 있었다. 토요일 오후면 가방을 둘러메고 오십천으로 돌 캐러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수석인 모양이었다.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매화석이라오!”

수석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한눈에 들었다. 잘 생긴 오석에 홍매 꽃이 연속무늬처럼 박혔는데 단아하면서도 고결했다. 가장 아끼는 걸 나를 위해 가져왔다는 거다. 고마웠다. 전등불빛에 매화향이 은은히 번지는 듯 했다.

 

 

그러고는 긴 겨울밤, 선배와 내 방에 함께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불을 끄고도 외동딸 진숙이 이야기며 촛대바위에 놀러오라는 이야기.....

“권시인 시는 읽어볼수록 좋아요.”

그리고 맨나중엔 그 말을 했다.

선배는 추어주기를 즐겨했다. 나뿐 아니라 후배를 보면 그가 누구든 진지한 문학담론보다는 덕담이나 정담을 좋아했고, 부담 없이 마시는 술을 즐겼고, 고향 삼척을 사랑했다.

 

 

이튿날, 선배를 고속버스에 태워 보내 드리고 돌아와 동시라기엔 좀 어려운 시 10편을 선배가 놓고 간 잡지사에 보냈는데 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선배는 그렇게 내게 시인이라는 딱지를 붙여주었다.

그날 선배는 나를 위해 수석이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낯선 서울거리를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찡하다.

 

 

지난 2018년인가 선배는 윤석중 문학상을 받았다.

고향에서 여고 교장 하랴, 지방신문 논설 쓰랴, 지방의 역사 문화 정리하랴, 시 쓰랴, 방대한 양의 평론 쓰랴, 술 마시랴, 그런 선배가 동시집 ‘하느님, 참 힘드시겠다’로 윤석중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그때 선배는 수상소감을 말하다가 말고 객석을 향해 ‘아, 저기 글 잘 쓰는 아무개 시인 오셨군요.’ ‘저기 이번 동시집 참 좋던데 아무개 시인 축하해 주러 오셔서 고맙습니다.’, ‘아무개 선생님, 아프다던 허리는 괜찮으신지요?’

 

 

수상소감보다도 눈에 띄는 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챙겨주거나 덕담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성미를 가진 이가 선배다. 선배는 그렇게 타인을 자신의 일의 중심에 놓고 거친 세상을 살았다. 술만 좀 줄였더라면, 잔소리삼아 그 말을 해보지만 모두 부질없는 넋두리일 뿐 선배는 그 술로 동시와 시와 동시대 사람들과 어울리며 잘 살았다.

‘선배님, 명복을 빌게요. 그쪽에 가셔서도 좋은 시 쓰시고, 아이들 즐겁게 가르치시고, 약주도 알맞게 하시며 부디 잘 지내세요’

나는 이미 저쪽 세상에 가 있는 선배가 읽으라고 선배 휴대폰에다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권시인, 잘 놀다 나중에 와요’ 어디선가 선배의 대답이 날아올 것 같다.

 

<아동문예>2022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