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27년만의 나들이 – 자유로움에서 풀잎 웃음까지

권영상 2022. 1. 2. 18:37

<장혜선 동시집 해설>

 

27년만의 나들이 – 자유로움에서 풀잎 웃음까지

권영상 (시인, 전 한국동시문학회회장)

 

 

장혜선 시인이 첫동시집을 낸다는 말을 아내로부터 들었을 때 나도 그 일에 뭔가 도움을 드려야겠구나, 했지요. 장혜선 시인은 제 아내와 아주 오랜 절친이며, 저의 대학 후배이며, 또 동시라는 장르를 함께 하는 동업자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제가 동시를 먼저 쓴 까닭에 ‘축하나 격려의 말씀’ 정도는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근데 보내온 동시집 원고를 받아보고 생각을 고쳐먹었지요. 첫동시집인데 결코 첫동시집 같지 않은, 생각이 깊은 시들로 가득해 뭔가 시를 정리해 드려야겠구나 싶어 시 해설을 쓰기로 했습니다.

 

장시인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로 등단하였지요. 그 후 작품 발표가 없어 능력을 인정받아 보는 걸로 끝내는가 했지요. 또 어느 때인가 30 여년이나 몸담고 있던 교직 생활을 접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치매를 앓고 계시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라는 거지요. 그때 저는 참 놀랐지요. 남들은 그런 상황이 오면 버렸던 직장을 다시 얻어 집을 나간다는 데 손수 돌봄을 자처하고 가정으로 돌아오신 겁니다.

 

분의 아내로 가족을 돌보고, 간병을 하고, 학교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글을 쓰는 일.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러니 신춘문예에 당선 된 후 무려 27년 만에 동시집을 내신다는 이 말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 그 아득한 기다림의 시간이 나를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 원고를 펼쳐보며 생각이 바뀌어 가는 걸 보았습니다.

여기에 실린 동시 53편은 27년이라는 시간이 집적된 영롱한 산물이 아닐까 합니다. 등단 하자마자 성급히 출간하는 시집들과는 격조가 다르네요. 이미 여러 권의 동시집을 낸 이에게서 풍기는 견고한 시 세계가 조용히 담겨 있습니다.

 

 

1. 길, 자연을 닮아 돌아오다

 

장혜선 시인의 첫동시집 <나를 따라온 바다>에서는 왠지 모를 시의 무게감이 느껴지네요. 구비구비 삶의 고비를 훌쩍 넘기고 돌아온 사람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세상을 해석하는 시인의 각별함도 눈에 쏙 들어올 만큼 반짝입니다.

 

덮여있는 책 속엔

들어갈 수 없어도

한 장만 넘기면

책 속으로 빨려든다.

책 속에선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책 속에

한 발을 딛는 순간

우리는 자유롭다.

 

 - ‘책’의 전문

 

시를 따라 읽으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길을 느낍니다. 장혜선 시인의 시는 여기 이 책속에 난, 빨려들 듯한 길을 걸어 출발합니다. 그 길은 책 바깥의 이쪽 세상보다 훨씬 더 자유롭습니다. 사유의 자유로움 때문입니다. 맨 끝 행 ‘우리는 자유롭다’ 는 진정 자유를 아는 이의 가슴에서 탁 터져나오는, 빛나는 감정의 유로가 아닐까 합니다. 지금 그 길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신발 틈에

바다에서 따라온

모래알이 숨어 있다.

 

반짝이는 모래알에는

파도소리가 묻어 있고

짭짤한 바다 냄새도 배어 있다.

 

내가

돌아서 올 때

바다가 몰래

나를 따라왔다.

 

- ‘나를 따라온 바다’ 전문

 

이 동시집의 표제시입니다. 장 시인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20대는 바다가 가까운 강릉에서 생활했지요. 숲을 걸어온 이의 몸에서 초록 냄새가 난다는 피카소의 말처럼 바닷길을 걸어온 시인의 시에서 짭짤한 바다 냄새가 나는 건 어쩌면 당연할 테지요.

길은 시인의 행복한 자유 여정이며 그 여정의 끝은 자연성에 가 닿는다는 작품이네요. 모래 한 알에서 바다를 보는 시인의 감성이 돋보입니다.

 

 

2. 순수한 동심

 

동심이란 무언가. 현실에서 조금 비켜난 어린이 마음의 무늬가 아닐까 합니다. 그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장혜선 시인일 테지요. 30년이 넘도록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그들과 함께 해 오셨으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어린이들과 함께 한 동심의 무늬가 찍혀 나오지 않을 수 없겠지요.

 

교실 스피커에서

6학년 형 목소리가 나왔다.

“주 생활목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형!”

“근배형!”

부르며

스피커 밑으로

달려나왔다.

 

- ‘1학년’ 전문

 

동심을 이만큼 잘 형상화한 시도 그리 흔하지 않을 듯 싶네요. 읽을수록 동심에 푹 빠져들게 하네요. 장혜선 선생님 교실의 왁자지껄한 아침 풍경이 눈에 선하게 드러납니다. 아이들에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근배형 목소리 그 자체가 근배형인 거지요. 누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건지를 잘 보여주는 청각 심상으로 가득한 시입니다.

 

어제는

아홉 살이었는데

눈을 떠 보니

열 살이 되었네.

 

동생은

한 살 더 먹고도

그대로 개구쟁이.

 

-새해

 

아홉 살이던 시 속의 나는 단 하룻밤 사이에 열 살이 되었군요. 이건 순전히 새해가 저지르는 장난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새해가 던져주는 그 나이에 순응하지 않네요. 동생에겐 동생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지요. 시간이 흘러 철이 들면 그때 나이를 먹는 거지요. ‘그대로 개구쟁이’라는 말에 동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나’의 아쉬움이 묻어있네요.

 

 

3. 시간의 흐름

 

저녁이

어둠을 데리고

살금살금 오고 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돌아보면

조금 더 가까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또 돌아보면

아주 가까이

 

저녁은

내 곁으로

그렇게 오고 있다.

 

  - ‘저녁’의 전문

 

장혜선 시인에게 있어 시간은 매우 특별하지요. 30여 년이라는 교직생활, 신춘문예에 당선 되고도 27년을 기다려온 시간, 가족을 간병하느라 바친 10여 년.....

이 시 ‘저녁’은 장시인이 살아온 삶이라는 시간의 멈춤과 흐름의 반복과 궤를 같이 하는 듯 합니다. 흘러오다가 멈추고, 흘러오다가 다시 멈추는 저녁이라는 시간의 반복은 장시인의 삶과 그 점에서 비슷하네요. 단조로울 듯 한 오후 시간의 흐름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와 결합시켜 다행스럽게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미한 시간을 흥미롭게 다루어가는 방식을 엿볼 수 있네요.

 

우리 엄마

아침 내내 하신 빨래를

몇 분만에 흠뻑

다 적셔 놓고

 

미안해서 보내는

소나기의 사과 편지

 

마루 밑에 벗어 놓은

내 고무신에

찰랑찰랑 빗물 가득

채워 놓고서

 

미안하다 보내온

소나기의 그림엽서

 

 - ‘무지개’의 전문

 

그림엽서 같은 비 온 뒤의 산뜻한 가을 풍경이네요.

한 줄금 비를 뿌리고 간 소나기는 짓궂네요. 엄마가 널어놓은 빨래를 적셔놓고, 마루 밑 내 고무신을 적셔놓았네요. 그러나 단단히 화가 난 엄마와 나를 위해 소나기는 깜짝 놀랄만한 사과의 선물을 보냈군요. 무지개네요. 무지개는 소나기가 이들에게 보내는 화해의 악수인 거지요. 읽는 기쁨을 짠, 하고 누릴 수 있는 깔끔한 시입니다.

 

 

4. 익살스러운 자연

 

장혜선 시인의 시에는 배경처럼 깔려있는 감정이 있습니다. 바로 웃음입니다. 아내의 절친인 장 시인을 나는 대학 시절에도 알고 지냈지요. 그때 내가 받은 그분의 인상은 보조개가 오목한 웃음입니다. 풀잎처럼 맑고 싱그러웠는데 시인은 그 웃음을 지금껏 깨끗하게 간직해 오고 있었네요.

 

오랜만에

바다엘 갔더니

파도가 달려 나와

내 신발에 물을 퍼붓고 간다.

 

나를 모래밭에 주저앉히고

까르르 웃으며 달아난다.

 

아주 오랜만에

바다엘 갔더니

바닷바람이 달려 나와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놓고 간다.

 

내 옷자락 사이로 찬 입김을 불어넣고

푸르르

웃으며 달아난다.

 

  -바닷가에서

 

파도와 바닷바람이 나를 좀 못 살게 군다 해도 시인은 그들까지 다 사랑하네요. 그들조차 ‘까르르’ 웃으며 달아난다고 보는 건 시인의 마음속에 세상을 장난스럽게 보는 해학과 웃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테지요. 장시인은 두 볼에 키운 그 오목한 웃음으로 이 먼데까지, 쉬운 일은 쉬워서 웃고, 힘든 일은 또 힘들어서 웃으며 걸어왔겠지요.

 

밤나무 밑에 가면

가랑잎 뒤에 숨은

밤 한 톨이 보인다.

 

돌 틈에 숨은

밤 한 톨이 보인다.

 

이젠 없나 보다

두리번거리며 서 있으면

 

“툭!”

바람이

내 머리에 알밤을

주고 간다.

 

- ‘알밤’ 전문

 

산다는 일은 우연이지요. 우연치고 재미있는 우연이지요. 내가 밤 한 톨을 주우러 산에 들어갈 때 밤나무는 나를 위해 알밤을 마련하여 그 시각 내 머리를 툭 맞히지요. 얼마나 절묘한 우연인가요. 이 우연이 만들어내는 웃음이 장 시인의 아무 계산 없는 풀잎 웃음이 아닐까 합니다. 시인의 내면에 웃음을 마련해 놓고 쓰는 이런 시는 언제든 누군가를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지요.

 

장혜선 시인의 시의 안뜰을 한 바퀴 빙 돌았네요.

시의 모서리를 잘 깎아만든 예쁜 시들로 가득한 공원입니다. 시마다 얼개가 잘 짜여져 있고 스토리가 있어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 번도 말귀를 놓치지 않았지요. 여기 8 편이나 되는 동시를 인용한 까닭도 그런 다시 읽는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27년의 공백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알게 된 것은 그 시기가 결코 공백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셔서 이것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임을 증명해 보이시기 바랍니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장혜선 동시집 <나를 따라온 바다> 브로콜리의숲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