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밥풀」과 제 5공화국

권영상 2021. 8. 11. 10:57

 

<내 시의 모티브>

 

「밥풀」과 제 5공화국

권영상

 

 

밥상을 들고 나간 자리에

밥풀 하나가 오도마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바깥을 나가려든 참에 다시 되돌아보아도

밥풀은 흰 성자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바쁜 발걸음 아래에서도 발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밟히면 그 순간 으깨어지고 마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도 없이

이 아침 분주한 방바닥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이 어린 성자의 얼굴로.....

 

      - 「밥풀」 전문

 

이 작품은 여섯 번째 동시집 『밥풀』(1991. 동화문학사)에 수록된 표제 동시다.

이해인 수녀님께서 중앙 모 일간지 ‘나를 흔든 시 한 줄’(2014. 1. 18)에 이 동시를 소개함으로서 널리 알려졌다.

방바닥에 떨어진 밥풀이 발길에 밟힐지 모르는 두려움을 떨치고 성자의 모습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는, 제법 대립 구조를 갖추고 있는 동시다. 시라면 시고, 동시라면 동시겠지만 나는 분명 ‘동시’로 썼다.

 

 

나는 강릉 태생이다. 30대 초반까지 강원도를 배경으로 살았고, 직장 생활도 그곳에서 했다. 그랬으니 그 무렵, 내 동시의 주 소재는 바다, 햇살, 종달새, 은에비, 보리밭 등 자연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로 읽는 삼국유사 『동트는 하늘』을 아동문예에 연재하면서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역사와 현실 쪽으로 이동했다. 그 무렵인 1986년 봄, 나는 강원도살이를 접고 상경했다. 그건 순전히 결혼을 하고도 2년 동안 주말부부로 살던 고충을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나를 맞아준 직장은 남대문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만리동 언덕에 있었다. 1887년이 되면서 수업을 하다가 창밖을 내다보면 도심 곳곳에서 시위의 함성이 울렸다. 제 5공화국의 압제와 체육관 선거방식을 고집하는 소위 4.13 호헌에 대한 분노였다.

나도 이 무렵 시위대의 한 귀퉁이에 끼어들거나 아니면 시위대를 지키며 응원했다. 시위가 없는 날엔 광주 민중 항쟁 현장을 담은 필름 상영을 찾아다녔다. 그건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일로 주로 몇몇 성당에서 은밀히 상영했는데 숨소리도 감추어 가며 소름끼치는 영상을 보고 혼자 돌아오는 밤은 인간적으로 무서웠다.

 

 

6월이 되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고, 이한열 사건도 그달에 일어났다. 참다못해 일어난 국민 항쟁 앞에 군부정권은 끝내 굴복하고 직선제 개헌이 담긴 6. 29 선언으로 손을 들었다. 이로써 군부 권위주의는 끝이 났고,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힘들고 고되었던 역사의 행진도 종지부를 찍었다.

그때 이 항쟁을 지켜보면서 나는 ‘현실과 먼 나’에서 ‘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나’로 변했다.

 

 

그 무렵, 나의 고민은 단 한 가지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동시로 구현해낼까 그거였다. 어린이 독자들도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어떻게 압제로부터 되찾아지는를 알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거친 현실을 거칠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현실을 구부리고 구부려야 하는 문학적 양심이 그때 내게 있었다.

그 긴 고민 끝에 나온 동시가 「밥풀」이다.

물론 『밥풀』 이전에 나온 동시집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1988. 남광출판사)에서 내 눈은 이미 현실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밥풀』이 나왔다. 부제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위한’이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은 노동을 착취당하는 당시의 나이 어린 공장 근로자, 자유를 억압당하는 힘없는 약자, 최루탄에 저항하며 쓰러지는 이들의 은유였고, 길에 떨어져 밟히는 단추, 단추 뒤에 가려진 단추 구멍, 골목 구석, 몽당연필, 말뚝, 밥풀 등을 그 형상물로 사용했다.

 

 

식사 후 방바닥에 떨어진 밥풀은 누구의 발길에 밟히게 될지 위험하다. 약자 중의 약자다. 밥풀을 밟는 발길은 밥풀이라는 존재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힘 센 자, 또는 지배자 또는 그 이상의 권력자.

그 두 존재의 대립에서 밥풀이 패할 것은 너무도 자명하지만 나는 밥풀이라는 존재야말로 두려움을 모르는, 두려움을 아예 초월한 성자로 만듦으로서 비록 짓밟힌다 해도 아름답고 숭고한 짓밟힘으로 승화시켜보려 애썼다.

 

 

지금 생각해도 압제의 그 시절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때야말로 나는 현실에 가장 가까이 밀착해 있었고, 살아있는 정신으로 현실을 동시로 담아내려 애썼다. 미약하나마 제법 동시를 사랑했다.

 

<아동문학평론> 202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