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상 동시집 <고양이와 나무> 해설
공존의 동시를 띄우다
김태호(춘천교대 교수)
1. 시는 왜 존재하는가?
그런 때가 있습니다. 문득 산다는 게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세상이 어떻게 가능하고,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질문을 내면에 품고 살아갑니다. 이 질문에 완벽히 답한 이는 없었지만,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열중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연, 인간, 사회를 연구하여 지식을 생성합니다. 그 결과가 학문입니다. 우리는 지식의 체계 속에서 세상을 이해합니다.여기,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시입니다. 시는 학문과는 다른 방식으로 답을 추구합니다. 시인들은 우주와 인간, 사물에 감춰진 비밀을 들춰냅니다. 시인은 우주를, 인간을, 사물을 마음에 품습니다. 마음에 들인 대상을 다시 보고 다시 느끼고 다시 사유하면서이면에 담긴 비밀을 추적합니다. 이를 가장 정확한 시적 언어로 표현하면 시가 발생합니다. 시인이 들려주는 비밀은 객관적으로 입증된 지식은 아니지만, 우리 마음에 가장 와닿는 진실입니다.
바람도 없는데
풋감이 떨어진다.
엄마, 감나무는 왜 아까운 풋감을
자꾸 버리지요?
얘야, 내 거라고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란다.
―「풋감과 감나무」 전문
누구나 소유하길 원합니다. 무언가를 소유하면 행복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소유하는 행복은 한계가 있습니다. 여전히 소유하지 못한 것이 남아 있으니까요. 평생을 소유해도 불행합니다. 자연은 이러한 이치를 알려줍니다. 감나무는 풋감을 버립니다. 풋감을 더 많이 소유할 수 있지만, 그러면 풋감을 제대로 길러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풋감을 떨굽니다. 떨군 풋감은 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길러냅니다. 과학자가 감나무를 보고 자연의 생리(生理)를 탐구할 때, 시인은 감나무에서 인생의 이치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내거라고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라고 씁니다.
2. 공존의 발견
시는 목소리입니다. 시를 읽으면 시의 목소리가 내면에 울립니다.말을 듣고 그 의미를 해석하듯이, 시를 읽으며 그 의미를 해석해야합니다. 동시집 『고양이와 나무』를 읽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동시에내재된 주제 의식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고양이와 나무』 안의 모든 동시가 동일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동시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 의식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존(共存)이라 생각합니다.
골목길에서
고양이가 운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이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는다.
가지가 꺾여
아파본 적은 있어도
한 번도 울어본 적 없는 나무들.
야아오오오.
속으로 따라 울어보느라
골목 밤길이 조용하다.
―「고양이와 나무」 전문
고양이와 나무는 친연성이 높지 않습니다. 고양이가 나무 위에 사는 것도 아니고,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도 아닙니다. 제각기 생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시인의 내면에 비친 고양이와 나무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입니다. 서로의 아픔에 공명합니다. 어두운 골목길에100 101서 고양이가 홀로 울면 나무들이 그 울음소리를 따라 웁니다.이것은 공생이 아닌, 공존입니다. 공생이 서로 이익을 주며 살아가는 관계라면, 공존은 이익을 떠나 함께 존재하는 관계입니다. 고양이와 나무는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지만 나무는 고양이의 아픔을교감하고 이해하려 합니다. 외롭고 쓸쓸한 고양이의 현실이 나무와의 공존을 통해 화합의 소망으로 변모합니다. 조용하고 어두운 골목밤길이 마냥 고독하지 않은 것은 고양이와 나무의 울음소리가 내밀하게 공명하기 때문입니다.『고양이와 나무』에서 시인은 생존을 넘어 공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생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생존하기위해 주위를 파괴한다면, 결국 홀로 남게 됩니다. 자신도 파멸에 이르지요. 공존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생명체들과 교감하고 삶의 순간을 같이하는 일입니다. 시인은 공존의 순간을 발견합니다. 구덩이에 빠진 가랑잎들은 다른 “가랑잎들을 밀어 올려주느라//바스락바스락/소란”합니다(「가랑잎들」). 길섶에 떨어진 “참새 깃털/하나”를보고 고만큼 추울 참새를 떠올립니다(「깃털」). 토끼가 새끼를 낳는날에는 말하고 보고 듣는 것을 가립니다. 그것이 토끼나 토끼 새끼에게 전해질 리 없는데도 말입니다(「토끼가 새끼 낳는 날」). 버려진의자를 보면 “눈을 맞추기 미안해/가만 돌아”섭니다. 공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내다 버린 의자」). 이렇게 시인은 공존이 삶의 필연적인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우 엄마가
기도합니다.
제 귀여운 아기를 봐서라도
제발 토끼를 잡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 무렵
토끼굴에서
토끼 엄마가 기도합니다.
제 귀여운 아기를 봐서라도
제발 여우에게 잡히지 않게 해주세요.
―「두 엄마」 전문
여우 엄마는 귀여운 아기를 위해 토끼 잡기를, 토끼 엄마는 귀여운 아기를 위해 여우에게 잡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여우와 토끼는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도, 이익 관계의문제도 아닙니다. 처연한 자연의 조건입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여102 103우와 토끼마저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단서는 모성성입니다. 여우와 토끼는 매일 사투를 벌이지만, 이것은 서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아기를 위해서입니다. 모성성을 통해 여우와 토끼는 현실적 생존을 넘어 초월적 공존으로 나아갑니다.
3. 동행하는 발걸음
아기가 태어납니다. 화안한 얼굴들이 아기를 둘러쌉니다. 가족입니다. 가족의 따스한 손길이 아기에게 닿습니다. 아기는 가족 품에안겨 잠이 듭니다. 아기의 얼굴은 한번도 본 적 없는 가족의 얼굴을닮아 있습니다(「세상에나」). 아기는 이내 가족들과 복닥거리며 살아갑니다. 동행은 이렇게 시작됩니다.가족은 동행의 공간입니다. 인간은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유아기부터 그를 돌볼 이들이 필요합니다. 가족이 그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가족 안에서 태어나고 이름 붙여지고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가족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인간은 불가피하게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질병이 생기거나 노년이 되거나 혹은 죽음에 이를 때 가족에게 의존합니다.이 힘든 동행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가족은 선험적으로 존재합니다. 탄생의 순간, 혈연에 의해 가족이 형성됩니다. 그렇지만 이 자체로 완벽한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도 인간일 뿐이고 고독과 상처 속에 살아갑니다. 가족끼리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가족 간에 얼굴을 맞대고 삶을함께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감정을 교감하고 서로의 아픔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혈연으로 주어진 가족을 넘어, 사랑으로 동행하는 가족이 됩니다.
엄마가 내온
콩국수
그 안에
송송
오이
오이 향기
―점심에 콩국수 먹었으면 했는데.
일하고 들어온 아빠
입이 벌어진다.
어쩌면 마음이 이렇게 딱 맞을까.
두 사람.
―「두 사람」 전문
엄마가 콩국수를 내오자, 마침 들어온 아빠가 콩국수가 먹고 싶다고 합니다. 기막힌 우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오랜 시간 삶을 함께했습니다. 자연히 생활 습관도 닮기 마련입니다.감이 딱 옵니다. 이쯤 되면 아빠가 콩국수를 찾겠구나 하는, 서로의내면을 깊이 이해하고 교감하며 살아왔기에 두 사람의 마음이 딱 맞습니다. 화자는 마음이 맞는 사람이 두 사람이라 했지만, 곧 세 사람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화자 역시 엄마, 아빠와 동행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아빠,
우리 딱지치기할까.
딱지,
좋지!
뻥!
내가 쳤다.
뻥!아빠가 쳤다.
내가 치고, 아빠가 치고, 내가 치고, 아빠가 치고.
뻥! 뻥!
뻥! 칠수록
아빠는 내 친구가 되고
나는 아빠 친구가 되고.
―「아빠, 뻥! 치자」 전문
아빠와 딱지를 칩니다. “내”가 뻥 치면 “아빠”가 뻥 칩니다. 번갈아가며 딱지를 치는 가운데, “아빠”와 “나”는 교감하고 서로의 친구가됩니다. 1연에서는 시적 상황이 전개됩니다. 딱지치기하자는 화자의 제안에 아빠가 선뜻 동의합니다. 2연에서는 본격적으로 딱지치기가 시작됩니다. “내가 치고, 아빠가 치고” 유사한 시구를 짝을 맞추어 표현하였습니다. 점차 가락이 빨라지는 만큼 나와 아빠의 심리적 거리감이 좁혀집니다. 3연에서는 “아빠는 내 친구가” “나는 아빠친구가” 됩니다. 이렇게 아빠와 나는 딱지를 통해 충만한 화합을 이룹니다.
할아버지 따라
장터에 가면 금방 배고프지.
그걸 아시고
할아버지가 찾아 들어가시는 국밥집
따로국밥요!
할아버지 주문에 밥 따로 국 따로 따로따로
따로국밥 둘
할아버지와 나
따로
또 같이.
―「따로따로」 전문
가족은 동행합니다. 여기서 동행은 상호 평등한 의존 관계를 전제합니다. 가족이라 하여 동일한 존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가족 중누군가가 다른 가족을 예속화하면 곤란합니다. 아니, 위험합니다.가족 구성원들은 저마다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치를실현하며 살면 됩니다. 그 여로에 겪는 행복과 아픔을 가족들이 교감하고 서로 의지하면 됩니다. 그래서 “따로국밥”입니다. 따로 존재하면서도 화합을 이루는 따로국밥처럼 나와 할아버지도 다른 가족들도 “따로/또 같이” 살아가며 화합을 이루면 됩니다.
4. 고독한 자, 유죄
고독한 순간이 있습니다. 세상에 나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세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친구가 될 수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무가 있고, 고양이가 있습니다. 공기가 있고, 흙이 있고, 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무수히 많은 존재들과총체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시인은 우리가 상실한 총체성의 감각을 동시를 통해 되살립니다.
펄펄
눈 내리는데,
사라진 길을 더듬어
아침이 나를 찾아왔다.
문을 열고 나가
호호 손을 불며 찾아온 아침을 맞는다.
펄펄 눈 내리는데,
발자국 하나 없는 길을 찾아 찾아
아침이
우리 집에 왔다.
―「눈 오는 아침」 전문
눈 오는 날 길이 지워집니다. 발자국도 보이지 않습니다. 길이나 발자국은 인간이 남긴 자취입니다. 함박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되면 다른 사람과 만나기 힘듭니다. 동물들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다른 생명체와 소통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죠. 그럼에도아침만은 찾아옵니다. 사라진 길을 더듬어, 발자국 하나 없는 길을찾아 아침은 다시 옵니다. 시인은 세상에 고독하게 존재하더라도,아침만은 그대 곁에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그렇습니다. 너무 고독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보름달이 절반 사라진 날, 남은 달의 절반은 개울물 속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반달」).고라니가 배추밭에서 달아나 산으로 향하면 산은 문을 열어 고라니를 덥석 품어 안아줍니다(「고라니」). 마당에 홀로 세워진 오토바이위에는 살구나무 그림자가 올라탑니다(「살구나무 그림자」). 푸른 하늘 햇빛 가게에서는 매일 좋은 품질의 햇빛을 우리에게 보내줍니다(「햇빛 가게」).유난히 외롭고 쓸쓸할 때에는 주위를 둘러보세요. 혼자가 아닙니다. 이미 공존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동시집의 목소리만은 그대곁을 지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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