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언제나 그렇듯 봄은 새로운 출발이다

권영상 2021. 3. 6. 13:28

 

언제나 그렇듯 봄은 새로운 출발이다

권영상

 

 

처음부터 거기 가려고 나선 게 아니다. 봄 햇살이 좋아 양재천이나 나가볼까 한 거였다. 청계산에서 흘러내리는 봄눈 녹은 물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 물에 발을 담근 버들개지들이 어쩌면 통통하게 꽃 피어있을 것도 같았다.

그 방향으로 걸어가는 한길 옆에 매화꽃이 한창이다. 그걸 보자 마음이 천천히 바뀌었다. 거기보다 거기로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이 빨라졌다. 거기란 이 철에 딱 맞는 봄꽃시장이다. 꽃을 사는 것도 사는 거지만 구경이나 하자며 꽃시장에 들어섰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유혹적이다. 코로나 때문에 어디 먼데도 못 가고, 집안에만 갇혀 사느라 겨울은 길고도 길었다. 화려한 양란보다 소박한 봄꽃들이 내 눈에 쏙 들어왔다. 봄꽃은 유별나다. 작다. 예쁘다. 눈에 쏙 들어온다. 꽃빛이 짜릿하다. 샛노랗다. 보라다. 다홍이다. 분홍이거나 빨강이다. 나는 가게 바닥에 쪽 깔린 그 작은 꽃들의 천국 앞에 서서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고.

 

 

그러다가 꽃바구니에 작은 꽃화분을 하나하나 집어 담았다. 노랑 팬지, 알록보라 너도부추, 꽃잎이 큰 퓨리물러, 봄향기 히아신스, 또 빨강 앵초꽃.

나는 주로 낯익은 만 원어치의 봄을 샀다.

칸나뿌리는 언제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물어보는 김에 로메인 상추씨와 샐러드 씨앗도 한 봉지씩 사서는 꽃 시장을 나왔다. 걸어오며 몇 번이고 비닐봉지 속에 든 봄을 들여다본다. 꽃잎이 다칠까봐 화분 배열을 다시 하고 다시 하며 집에 돌아왔다. 베란다 물통 둘레에 빙 돌아가며 화분을 놓고 또 들여다본다. 이 작고 예쁘고 앙증맞은 봄을 앞으로 3월이 다 갈 때까지 두고 볼 수 있다는 게 즐겁다. 즐겁다 못해 막 행복해진다.

 

 

근데, 꽃 만난 것도 인연일까. 꽃시장 걸음을 한 번 더 해야하는 행운을 잡았다. 이 어두운 시절에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 내게 날아왔다.

지인의 아들이 취직을 했다는 거다. 그에겐 어렸을 때부터 꿈꾸어온 소중한 분야가 있었다. 그는 그 꿈을 잃지 않고 그 분야의 학교를 다녔고, 거기에 맞는 직종에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꿈을 지켜낸 그의 의지가 대견스러워 내 마음이 뛰었다. 젊은이들이 취직을 못하는 세상에서 듣는 취직 소리는 세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아름답다.

 

 

나는 대뜸 차를 몰아 꽃시장으로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꽃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받아서 반갑지 않을 꽃이 어디 있을까만 그래도 그 많은 꽃화분 중에서 내 마음을 담아보낼 만한 곱고 기운차고 벅찬 꽃을 골랐다.

화분을 사는 이유를 듣고 난 안주인 사장님이 ‘새로운 출발을 축하합니다’ 라는 리본을 멋지게 써서 달아주며 수취인 주소를 물었다. 같은 서울이니까 오늘 안으로 배달이 된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돌아섰다. 이 꽃을 받고 기뻐할 지인과 지인의 아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들의 고되고 고된 취업여정을 잠시 위로해 줄 수 있어 나도 기쁘다.

 

 

그냥 나오려다가 아내가 좋아할 제대로 된 라벤더 화분을 샀다. 보라꽃대가 봄기운을 따라 무수히 올라오는 건강한 녀석이다. 올해는 바쁜 일로 입춘을 넘겨서야 입춘부를 써 대문에 붙였는데 이렇게 좋은 일이 봄을 따라 찾아와 주었다.

바라건대 취직을 바라는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고, 그들이 꿈을 이루어가는 그런 봄이 되길 염원해 본다. 언제나 그렇듯 봄은 새로운 출발이다.

 

<교차로신문> 2021년 3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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