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 부스러기눈
권영상
봄눈이 온다. 부스러기 봄눈.
하루종일 온다. 금방 그칠 것처럼 푸슬푸슬 내리면서 종일 온다. 구정이 엊그제였으니 겨울로 친다면 아직 삼동 중에 있다. 그런데도 눈의 느낌이 다르다. 부스러기눈 내리는 걸 보면서 아, 봄눈이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창을 열고 한참을 내다본다. 마당가 매실나무 가지 사이로, 배롱나무 촘촘한 가지 사이로 부스러기처럼 푸슬푸슬 내린다. 가지와 가지 사이로 내리더니 가지 위로 소복이 쌓인다. 건너편 산이 벌써 하얗다. 거기 눈 맞고 선 나무들이 어쩐지 고요하다. 간밤 그 숲에서 부엉이가 붐붐 밤 늦도록 울었고, 나무들은 찬 바람에 흔들렸다. 근데 오늘은 다르다. 뭔가 생각이 많은 사람들처럼 부스러기눈을 조용히 맞고 서 있다.
어제만 해도 날씨가 좋았다.
서울에서 내려오자마자 텃밭 온상부터 찾았다. 온상엔 초겨울에 옮겨 심어놓은 상추 몇 포기, 쑥갓 몇 포기, 근대 몇 포기가 전부다. 식물이란 것이 참 놀랍다. 모진 겨울 한철을 맨비닐 속에서 부들부들 떨며 났다. 물론 태반이 얼어죽었다. 비닐을 걷어보니, 난데없는 냉이와 수레국화, 봄풀이 반을 차지하고 있고, 그 곁에 듬성듬성 상추 쑥갓 근대가 겨우 푸른 빛을 부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냉이며 봄풀이 추위에 견뎌내는 걸 보고 이들이 힘을 내어 살아낸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그들의 진득한 목숨이 대견해 집안에서 물을 길어다 충분히 주었다.
그러고 허리를 펴는데 뜰보리수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가 너무 많아 한번 손을 봐야지 했던 나무다. 볕이 부드럽고 따스하다. 요사이 대엿새 동안은 분명히 봄이다. 나는 자꾸 봄처럼 성급해지는 마음을 누르며 톱과 전지가위를 꺼내들었다.
유튜브에서 배운 도장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장지란 숨어 있던 나무눈이 급작스레 뻗어나가는 가지를 말한다. 미끈하게 컸으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헛가지다. 나무를 전지할 때 제일 먼저 제거해야할 가지가 이 도장지다.
뜰보리수나무는, 해마다 두고 보지만 도장지가 무수히 나온다. 나는 그들을 톱으로 잘라내어 굵은 것은 굵은 것대로 가는 것은 가는 것대로 묶었다. 다 쓸데가 있다. 토마토나 마, 가지, 고추 지주대로 쓰기에 딱 좋다. 묶은 도장지 단을 안아 나르는데 향긋한 냄새가 났다. 톱이 지나간 자리에 코를 대어본다. 촉촉하다. 푸른 향내가 난다. 봄 향내다.
나무단을 창고에 두고 차를 몰아 근방 저수지를 찾아갔다. 안성에 내려오면서 나는 저수지 생각을 했다. 어쩌면 거기 물가 버드나무에 버들개지 피고, 그 가지들 사이로 봄새인 노랑턱멧새가 조빗조빗 봄빛을 물어나를 걸 생각했다. 나는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머뭇거리는 사이 봄은 금방 우리 곁에 온다. 봄도 연둣빛 햇봄이 예쁘지 않은가.
하지만 찾아간 저수지는 아직 한겨울이었다. 가운데만 물이 펀할 뿐 빙 돌아가며 가장자리는 그대로 얼음장이다. 물안의 오리들만 날고 앉고 뜨고 자맥질할 뿐 저수지를 미끄러져 오는 바람은 차고 거칠어 반 바퀴를 돌다가 그만 왔다.
근데 오늘은 눈이다. 부스러기 봄눈. 제법 쌓인다. 나는 눈가래를 들고 마당에 눈길을 낸다. 먼저 보일러실로 가는 길을 내고, 텃밭 온상으로 가는 길을 낸다. 길을 내는 일은 좋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인생이라는 길을 내며 여기까지 왔다. 눈가래를 들고 문밖으로 나간다. 큰길을 친다. 이 길로 쭉 가면 거기는 어디일까. 거기에서 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교차로신문> 2021년 2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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