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대한 싱거운 질문
권영상
어렸을 적부터 싱거운 소리를 잘 했다. 대책 없는 소리라든가, 대답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드러내놓고 묻거나 하여 주위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할 때가 많았다. 어쩌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큰 막내 기질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래 교류해 온, 연세 많은 분들을 만날 때도 그렇다. 얼마간 대화하다가도 기분이 상승하면 괜히 싱거운 질문을 드리곤 한다.
“살아보시니 어떠세요? 사람의 인생이란 게 정말 짧은가요, 살 만한가요?”
나는 살아오면서 이런 게 가끔 궁금했다. 생명에 대한 비밀 같은 거. 상대적이긴 하나 정말 인생이란 게 긴 건지 짧은 건지. ‘인생은 짧다’ 라는 말은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니 당연히 아무도 살아보니 인생이 길더라거나 마침맞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데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오면서 가끔 살아온 날을 뒤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살아온 날이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아득하다는 거다.
정말이지 인생이란 게 살아볼 게 없을 만큼 잠깐이라는 말은 진실인가. 그런 궁금함을 그냥 넘기지 못해 연로한 분들에게 질문을 드려보지만 다들 대답을 피했다. 대답하기에 석연찮은 질문이라 그런 듯 했다. 다른 것도 아닌 자신의 수명에 관한 대답을 스스로 규정짓기 싫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길다고 말하자니 그렇고, 짧다고 말하는 것 역시 수명에 대한 욕심과 생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아 대답을 피하는 것 같았다.
하여튼 나는 좀 싱거운 사람이 틀림없다. 오래 사신 분들에게 꺼림직한 대답을 직접 듣고 싶어한다는 것이 그렇다. 이게 바로 싱거운 사람의 싱거운 특성이다. 근데 어제다. 내 방안의 묵은 책더미에서 그 대답을 찾을 만한 책 한권을 만났다.
이산 김광섭 시인의 시선집 ‘겨울날’이다. 김광섭 시인은 한때 교과서에 실린 시 ‘성북동 비둘기’로 잘 알려진 분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이 시 또한 1970년대 유심초가 부른 ’저녁에‘라는 노래로 잘 알려졌다.
나는 그분의 시집 ‘겨울날’의 먼지를 털어내고 단풍잎처럼 바싹 마른 책갈피를 넘기다가 맨 뒷장을 열었다. ‘1975년 눈 내리는 날에’라는 내 만년필 글씨가 적혀 있다. 그러니까 45년 전, 오늘처럼 눈 내리는, 기억에도 없는 아련한 날에 산 모양이다.
시인 김광섭은 1905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고향의 중동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한다. 그러다가 해방 후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지냈는데, 1974년 일지사에서 ‘김광섭 시전집’을 냈다. 그 전집 산문에 이런 글이 있다.
‘인생은 짧고 무상하지만 아무 일도 못할 정도로 짧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 말이다. 앞서 내가 여쭈어본 분으로부터 듣지 못한 대답을 여기서 듣는 것 같았다.
다들 인생은 짧다 짧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 주어진 일을 못할 정도로 짧은 것은 아니라는 그분의 말이 내 마음에 솔직하게 다가왔다. 수명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이 지상에서 천상의 그 별과 교류하는, 시인의 우주적 관조가 엿보이는 말 같았다.
‘인생은 짧다’는 말은 분명히 상대적이다. 누구에게는 길고 누구에겐 짧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들 짧다고 할 때 짧은 것만은 아니라고 하는 그의 말이 귀하고 아름답다. 싱거운 소리 덕분에 인생의 비밀 한 점을 어렴풋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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